‘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선언에는 재벌의 가장 큰 폐해로 지적돼온 경영권 세습의 고리를 끊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 부회장은 슬하에 아들(20세)과 딸(16세)을 두고 있다. 아들은 2013년 영훈국제중학교 입학 당시 사회적 배려자 전형에 지원한 게 논란이 됐다. 현재 해외에서 수학 중이다. 딸은 2016년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공연에 역대 최연소 주연으로 발탁되며 주목받았다. 딸의 공연을 관람하는 이 부회장이 수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두 자녀를 둔 이 부회장이 4세 경영을 포기하는 것은 3세대를 거친 승계 과정에서 받은 사회적 비판 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매입 의혹, 삼성SDS 일감 몰아주기 논란 등을 의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은 6일 기자회견에서도 삼성을 둘러싼 논란은 근본적으로 승계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라고 언급했다.
실제 삼성전자의 눈부신 성장에도 불구하고 승계 과정의 편법·불법 등이 대중에게 강력하게 인식돼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 부회장은 이 같은 논란을 인식해 ‘책임경영’을 강조해 왔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최초로 이사회 의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해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했다. 2018년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한 데 이은 경영 투명성 제고의 시도로 평가된다. 삼성물산도 같은 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면서 이사회에 무게를 실었다. 이 부회장의 세습경영 중단 선언으로 삼성전자 그룹의 타 계열사들도 책임경영을 강화하는 추세를 따라갈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 안팎에선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 기업의 규모를 감당할 수 있는 전문성과 통찰력을 갖춘 최고 수준의 경영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 이번 선언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는다.
이 때문에 주목받는 곳이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금융·건설·항공·가전·통신·제약 등 100여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담당한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릭슨, 스카니아 등의 기업 지분도 보유 중이다. 발렌베리 가문이 유명한 것은 가문의 후계자 선정과정 때문이다. 160년간 5대에 걸쳐 ‘가족경영’을 해왔지만 엄격한 후계자 선정과정과 사회공헌으로 인정받아 왔다.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는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10년간 다른 기업에 다니며 사회공헌을 해야 하고 실무 감각을 익혀야 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2월 방한한 발렌베리 가문의 다섯 번째 후계자 마르쿠스 발렌베리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SEB)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
일각에선 이 부회장의 선언이 편법 없이 삼성그룹을 물려주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한 것이라는 시각도 내놓는다. 천문학적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하는 게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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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지 기자 10000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