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A양(17)은 지난해 4월 남의 일로만 알았던 ‘지인능욕’ 사건을 학교에서 목격했다. 누군가 나체 사진에 같은 학교 여학생의 얼굴을 합성해 교실에 놓아 둔 것이다. 같은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학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실시했지만 바뀐 건 없었다.
A양은 “성교육 이후에도 남학생들이 자신의 SNS 계정에 n번방 기사를 공유하며 ‘피해자가 몸 팔아 쉽게 돈 벌려다 걸린 거다’라는 식의 댓글을 달았다”며 “뭘 배웠는지도 모르겠는데, 학교 성교육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국민일보의 ‘n번방 추적기’ 시리즈 기사로 사회적 논란이 된 텔레그램 성착취 사태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성인식이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보여줬다. ‘박사’ 조주빈(25)과 함께 ‘박사방’을 운영한 대화명 ‘부따’ 강훈(19)과 ‘태평양’ 이모(16)군은 10대였고, 지난달 22일 경찰이 밝힌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가해자 중에도 10대가 31.2%, 20대는 41.8%에 달했다. 피해자 역시 165명 중 144명이 10, 20대였다. 전문가들과 일선 교사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어린 연령층에서 발생하는 배경에 부실한 현행 성교육 시스템이 있다고 지적한다.
1년에 고작 15시간, 교육방식 제각각
교육부는 2015년 성교육을 국가 수준에서 체계화하고 내실화하겠다며 ‘성교육 표준안’을 도입하고 전국 초·중·고교에서 연간 15시간 이상을 성교육에 할애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나 정작 교육 현장에서 성교육은 입시 교육과 학사지도에 밀려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행 교육과정은 성교육을 포함한 ‘보건’ 과목을 필수교과로 지정하지 않았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관내 1339개 초·중·고·특수학교는 모두 보건 관련 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창체) 시간 등을 활용해 성교육을 했지만 창체 시간에는 주로 범교과 학습이 이뤄지기 때문에 내실 있는 성교육이 이뤄지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기도의 초등학교 보건교사 김영숙 교사는 6일 “과학시간에 암컷과 수컷에 대해 배워도, 도덕시간에 예의범절을 배워도 성교육으로 인정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또 교육방식도 학교에 따라 제각각이라 보건 교사가 토의와 토론 중심으로 꾸준히 수업하는 학교가 있는 반면 외부 강사의 일회성 강연으로 때우는 학교도 적지 않다.
학생들의 체감 효과도 크지 않다. 중학생 박모(15)군은 “우리 학교는 1년에 2번 정도 한 학년 200명을 통째로 시청각실에 모아 성교육하고 나머지 학년은 교실에서 TV로 지켜본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B양(17)도 “교실에서 선생님 없이 방송만 틀어줄 때도 있다”며 “솔직히 성교육을 받았다는 기억조차 없다”고 털어놨다.
교과서도 10년째 그대로
보건 교과서도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중·고등학교 보건 교과서는 2015년 교육과정에 맞춰져 있지만, 초등학교 보건 교과서는 2009년 이후 단 한 차례도 수정되지 않았다. 디지털 성범죄 등 최근 논란이 된 사회적 문제는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도 없다.
본보가 시중에서 판매되는 중학교 보건 교과서 2종을 살펴본 결과 디지털 성범죄 관련 언급은 없거나 간단한 수준에 그쳤다. 성폭력 유형을 나열하면서 ‘사이버 성폭력’이나 ‘메신저로 야한 사진·동영상 전달’ 등을 언급하는 수준이다.
교과서가 부실하니 일선 교사들은 아예 직접 자료를 개발하거나 여성가족부, 성문화센터 등의 교육 자료에 기댈 수밖에 없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보건교사는 “교과서에는 여전히 ‘싫어요, 안돼요라고 말하라’거나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등의 서술뿐”이라며 “지금 벌어지는 성범죄 실정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교사, 학교 따라 성교육도 양극화
강제성도 없고, 교과서도 부실하다보니 학교 성교육은 교사 개인의 열정과 능력에 따라 질적인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학교 환경의 영향도 있다. 경기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김지학 보건교사는 “우리 학교에선 기존 성교육에 자유학기제를 추가해 성교육과 정신건강 심화학습반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경기도의 다른 학교 보건 교사는 “학교에서 성교육 수업을 열겠다고 하면 ‘그럼 보건실은 누가 지키냐’는 물음부터 돌아온다”고 했다.
급기야 지난 3월 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의무 성교육’을 더욱 체계적, 현실적으로 개편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고등학생이 올린 이 청원은 1만여명의 동의를 얻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성교육을 아예 필수 교과 과정에 넣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우옥영 경기대 보육대학원 교수는 “교과 자체는 필수로 하되 교육 방법은 급격한 현실 변화를 반영할 수 있도록 현장에 자율권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나임윤경 양성평등교육원장은 “아동과 청소년의 성 문제를 보건 교사의 몫으로만 놔둬선 안 된다”며 “모든 교육자가 시대적 요구에 맞는 성 관념을 익히고 학생에게 전달해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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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모 김지애 기자 ss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