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공연 모두 취소… “무대 없어도 연습은 계속해요”

입력 2020-05-09 04:04
발레리노로는 한국인 최초로 영국 로열발레단에 입단한 전준혁. 로열오페라하우스 폐쇄 이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매일 발레단 교사들의 재능기부로 진행되는 온라인 발레 클래스에 참여하며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지난 3월 중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올해 영국 로열발레단 공연이 모두 취소됐을 때, 단원인 전준혁(22)은 암담했다. 그래도 매일 런던 중심가에 있는 로열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무용수로서 몸을 굳게 놔둘 수는 없었다. 연습실은 동료 단원들로 북적였다. 100명 가까운 단원들이 몰려들자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연습실도 폐쇄됐다. 대신 로열발레단의 발레교사들은 불안해하는 단원들을 위해 ‘온라인 발레 클래스’를 열기로 결정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연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전준혁을 4일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전준혁은 2014년 한국인 최초로 로열발레학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고, 2017년엔 한국인 발레리노 최초로 로열발레단에 입단했다. 앞서 발레리나로는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 최유희가 입단해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발레단에서 다양한 작품을 경험하며 한창 재미를 느끼고 있었던 그지만 코로나19 탓에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극장이 문을 닫으며서 전속단체인 발레단의 단워들도 휴직상태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6일 입국한 그는 안전을 위해 2주간 서울 본가에서 자체 자가격리 기간을 가졌다. 자가격리 기간에는 방에서, 그 이후엔 어머니가 운영하는 발레연습실에서 로열발레단의 ‘온라인 클래스’에 참석하고 있다. 하루라도 훈련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무용수들의 강박증에서 그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영상통화로 진행되는 온라인 클래스는 영국 시간으로 오전 10시30분, 한국 시간으로는 저녁 6시30분에 시작한다. 월·수·금은 발레, 화·목은 필라테스나 피트니스가 진행된다. 전체 단원 120명 가운데 매일 80~90명이 참석한다. 전준혁은 “점프 연습이나 공간을 넓게 쓰는 동작을 하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이게 어딘가 싶다”면서 “온라인 클래스가 없을 때는 맨몸운동 위주로 체력을 단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상황이 언제 나아져 극장의 문이 다시 열릴지 미지수다. 일각에선 내년 초까진 런던에서 공연을 올리기 어렵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기약 없는 출국을 기다리는 상태지만 그는 성격상 가만히 있지 못한다. 현재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의 김주원 성신여대 교수의 부탁으로 온라인 특강을 준비하고 있다. 또 코로나19가 진정된 서울에서 제대로 된 발레 클래스에 참여하는 방법도 찾아볼 계획이다.

온라인 발레 공연도 틈날 때마다 감상한다. 무대가 그립고, 발레가 목마른 그에게 휴식이자 공부의 시간이다. 온라인이지만 이렇게라도 발레를 보는 그를 비롯해 코로나19로 침울해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는 “발레는 언어 장벽을 뛰어넘는 예술”이라면서 “많은 사람이 무용수의 몸짓을 통해 희망과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어 “무료 온라인공연을 통해 그동안 발레를 보지 못했던 사람도 발레를 접한 뒤 코로나19 종식 이후 극장에서 제대로 보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유니버설 발레단 단원이었던 둘째 고모 전정아, 스웨덴 왕립발레단 솔리스트였던 셋째 고모 전은선 등 쟁쟁한 발레 가족을 둔 그에게 발레는 숙명 같은 존재다. 4살 때 토슈즈를 처음 신은 이후 발레리노 이외의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 2014년 발레 꿈나무의 등용문인 스위스 로잔콩쿠르에서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그는 로열발레학교의 입학 제안을 받고 유학을 떠났다. 동양인이 극히 적은 로열발레학교에서 그는 처음엔 인종차별 가까운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용하지만 근성 있는 그는 끝없는 연습으로 이겨냈다.

사진=윤성호 기자

그는 “요령을 피우는 성격이 못되서 연습에만 몰두했다”면서 “고질적인 박자 문제 등 부족한 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어느새 기량이 늘었다”고 뒤돌아봤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재학 중이던 2016년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에서 한국인으로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무용수 서희(2003),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2012)에 이어 대상을 차지했다.

스스로를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에게 슬럼프는 먼 존재다. 그는 “연습할 게 많아서인지 슬럼프를 경험한 적이 없다”면서 “앞으로도 슬럼프는 없을 것 같다. 그럴 시간도 아깝다”고 웃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