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이재용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 않겠다”

입력 2020-05-07 04:01 수정 2020-05-07 04:01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의혹 및 노조 문제 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허리를 숙이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사과문 낭독을 마칠 때까지 총 세 차례 단상 옆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윤성호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자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삼성그룹이 고수해온 ‘무노조 경영’ 방침도 공개적으로 철회했다. 이 부회장의 이 같은 선언은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인 결과지만, 과거 잘못에 대한 사과와 삼성이 나아갈 방향까지 담아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부회장은 6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경영권 승계와 노조 문제 관련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삼성이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실망을 안겨드리고 심려를 끼쳐드린 것은 저의 부족함과 잘못 때문”이라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가 직접 대국민 사과에 나선 것은 2015년 메르스(MERS) 사태 당시 삼성서울병원의 책임과 관련해 사과한 이후 5년 만이다.

이날 회견의 핵심은 ‘4세 경영’을 포기한 부분이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2대 이건희 회장, 본인으로 이어지는 3대 승계 구조가 더는 이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최근 삼성을 둘러싸고 제기된 많은 논란은 근본적으로 경영권 승계 때문”이라며 “이제는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삼성그룹이 고수해온 무노조 경영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며 노사 관계 법령 준수와 노동3권 보장을 약속했다.

이 부회장의 사과를 두고 삼성에 대한 우호 여론을 형성해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법리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란 시각도 있다. 다만 사과 수위가 재계의 예상을 넘어섰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은 입장 발표에 앞서 참모진 등 주변의 우려에도 삼성의 변화를 위한 소신을 밝히겠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약 2개월간 내부 논의와 외부 조언 수렴을 거쳤고, 이날 오전까지도 본인이 직접 수정 작업을 거듭했다고 한다.

삼성의 미래 비전과 도전 의지도 내비쳤다. 이 부회장은 “한 차원 더 높이 비약하는 새로운 삼성을 꿈꾸고 있다”며 “끊임없는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 신사업에 과감히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법을 어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않겠다. 편법에 기대거나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만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삼성의 ‘재벌’ 꼬리표를 떼기 위한 움직임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최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가 확산되자 300억원의 성금을 기부하고, 삼성연수원을 생활치료센터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국내외 생산 라인과 공사 현장을 방문하는 등 적극적인 ‘현장 경영’ 행보도 이어질 전망이다.

이 부회장은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이 끝난 뒤에도 준법감시위가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준법감시위는 7일 정기 회의를 열고 이 부회장의 사과에 대한 입장과 후속 조치를 발표할 예정이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