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기독교 역사 밝힌 20개의 등불

입력 2020-05-08 00:03 수정 2020-05-10 12:57

여성 철학자 에디트 슈타인(1891~1942)은 유대계 혈통이란 이유로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에 희생됐다. 사실 슈타인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독일 수녀였다. 하지만 유대인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고 동족의 치욕에 동참한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나치 친위대에 “예수 그리스도는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인사한다. 유대인 임시수용소에서 대기할 때는 죽음의 공포에 떠는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한다. 그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동포들과 함께 숨을 거뒀다. 임시수용소에서 슈타인을 만난 작가 에티 힐레숨(1914~1943)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그분이 얼마나 내게 큰 영향을 줬는지 몰라. 겨우 몇 분 본 사람에게도 말이야”라고 적었다.


세계 성공회의 지도자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저자 로완 윌리엄스는 이 비극적 이야기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어두운 세상을 밝힌 기독교 신앙의 빛이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시인인 저자는 이처럼 시대의 등불 같은 인물을 루미나리스(빛나는 존재들)라 칭한다.

책에는 슈타인과 힐레숨 등 저자의 삶과 신학에 깊은 영감을 준 20명의 선각자가 나온다. 성공회 신학자이지만 가톨릭부터 정교회까지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인물을 폭넓게 아우른다. 처음 소개된 인물은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도덕군자가 아니었지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박해를 받는 가운데도 복음 전파의 열정으로 기존 세상을 뒤집어놓을 ‘기독교 세계’를 탄생시켰다.

영국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정책을 시민에게 국가가 강요해선 안 된다’는 신념으로 노예제 폐지에 나섰다. 저자는 지금 그리스도인도 이런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적 책임과 사회정의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이 국가와 입법자에게 이윤과 안위보다 더욱 중대한 사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 간호사로서 보건 제도를 혁신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 그의 별명은 ‘등불을 든 여인’이었다. 밤마다 등불을 들고 야전병원을 순회한 모습을 빗댄 것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나이팅게일처럼 어둠에 빠진 소외 계층에 관심이란 등불을 비추라는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히틀러를 공개 비판하며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목회자를 대상으로 비밀리에 신학교를 운영했다. 1939년 강연 목적으로 방문한 뉴욕에 정착할 기회가 있었지만, 성경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가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 8:32)이란 말씀을 품고 시대의 문제에 돌진했다.

철학과 신학을 넘나드는 내용이지만 인물 중심의 이야기라 어렵진 않다. 주낙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는 추천사에서 “로완 윌리엄스 신학의 빼어난 입문서”로 평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