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톡방서도 친인척 능욕… 우리 곁에 숱한 ‘n번방’ 있다

입력 2020-05-06 04:04

‘박사’ 조주빈(25) 검거를 시작으로 온라인에서 벌어진 성착취 사건이 한국사회를 흔든 지 5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n번방’과 ‘박사방’에서 유통된 성착취 영상물 외에도 훨씬 더 다양한 형태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있다.

10, 20대를 중심으로 가장 만연한 디지털 성범죄는 이른바 ‘지인능욕’이다. 지인능욕은 친구나 회사 동료 등 지인의 SNS 사진을 도용하거나 이들을 몰래 촬영한 사진을 여러 명이 돌려보면서 온라인에서 성추행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국민일보가 살펴본 결과 어린이날인 5일 오전까지도 텀블러와 텀벡스 등 해외에 서버를 둔 SNS 계정에는 지인능욕 게시물이 수없이 검색됐다. 한 텀블러 계정에는 ‘○○고등학교 재학 중인 ○○○’라는 여고생의 사진과 구체적인 신상정보 및 SNS 계정, 그리고 집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가 기재돼 있었다. 취재진이 페이스북 계정과 전화번호 등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피해자는 실재하는 인물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분명한 범죄이며 처벌 대상이지만 SNS에서는 범죄에 대한 자각이나 경각심이 전혀 없었다.

지인능욕 행위는 종종 지인의 얼굴 사진을 음란물에 합성해 게시하는 등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으로도 이어졌다. 지인의 얼굴과 음란물을 합성한 사진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예 ‘얼굴을 흥분하는 표정 등으로 바꿔 주겠다’거나 ‘여사친(여자사람친구) 사진을 무료로 합성해드립니다’라고 광고하는 트위터 계정도 상당했다. 계정 이름이 ‘고딩’인 한 유저는 미성년자 사진으로만 합성물을 제작하고 유포하기도 했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진이 유출되다 보니 피해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엔 피해자가 본인의 사진 및 신상정보가 유포됐는지 찾아보는 방법을 설명하는 ‘지인능욕 백과사전 본인 찾기’라는 글도 올라와 있다.

이미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유포돼 피해사실을 알고도 대응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 사진과 전화번호가 유출돼 피해를 입었다는 A씨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살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더라”며 “오래전에 유출돼 이제 체념했고, 그냥 대충 무시하면서 살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지인능욕은 친인척을 상대로도 이뤄지고 있었다. 한 여성 변호사는 “친척 중 한 사람이 의뢰인의 사진을 회사 동료들과의 단체대화방에 올려놓고 돌려보면서 험담했다며 상담하러 오는 이들도 많다”며 “주변 지인이나 친인척이 이런 짓을 벌여 알고도 신고하지 못하는 ‘침묵하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지인능욕이나 딥페이크 합성물 제작·유포는 모두 처벌 가능한 범죄행위다. 특히 다음 달 25일부터는 개정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허위영상물을 제작하거나 반포하는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만약 영리 목적으로 죄를 범했다면 7년 이하 징역에 처해진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댓글도 통신매체이용음란죄로 처벌될 수 있으며, 명예훼손이나 모욕죄가 성립될 수 있다.

이들 디지털 성범죄는 최근 새로 생겨난 유형이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 디지털 플랫폼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버젓이 이뤄져 왔다. 사회적 논란이 일어날 때만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다시 나타났다. 실제 텀블러와 텀벡스는 과거 음란물 유포 문제로 강력한 시정 조치가 취해진 바 있다. 텀블러 미국 본사는 2018년 12월 음란물 영구 금지 조치가 내려졌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의 무대가 됐다.

웹하드 서비스 역시 마찬가지다. 네티즌들이 많이 이용하는 웹하드 사이트 등에는 포르노 영상뿐 아니라 일반인이 촬영한 불법영상이 지금도 계속 올라오고 있다. ‘카메라’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랑 가출해 찍은 셀프 카메라’ ‘○○ 셀프 카메라’ 등 불법적으로 촬영된 ‘직캠’ 영상이 끝없이 나온다. 검색 없이 성인탭의 페이지만 넘겨봐도 일반인이 촬영한 불법촬영물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웹하드 서비스 역시 2018년 ‘웹하드 카르텔 사건’ 때 논란이 돼 지난해 방지대책이 나왔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던 셈이다.

한 여성인권 활동가는 “n번방 사건은 비단 텔레그램이나 조주빈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이미 수많은 n번방이 우리 사회에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해자는 가차 없이 발본색원하고, 나아가 이것이 끔찍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성폭력상담소의 한 관계자는 “디지털 성범죄는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서 절대 한번에 없어지지 않는다”며 “피해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가해자를 반드시 엄벌할 수 있는 방안이 만들어져야 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보현 기자 bob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