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선 4일 열심히 농사일하고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장터로 나갔다. 하얀 세모시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중절모를 쓰신 아버지가 부채를 살살 흔들며 장에 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젊은 여자를 데려온 날도 장터에 간 날이었다.
사연인즉슨 집으로 오는 길에 물가에서 누가 슬피 울더란다. 아버지가 찾아가 무슨 일이냐 물으니 죽으려고 한다는 거다. 알고 봤더니 그 젊은 여자는 아버지가 자주 가던 국숫집 아저씨의 며느리였다. 그냥 놔둘 수 없어 일단 집에 데려왔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국숫집 형편이 어려워져 집 없이 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한다.
국숫집 부부는 우리 집에 와서 2년 가까이 살았다. 방 3칸짜리 농가였는데 사랑채는 또 누구 빌려줘서 이분들은 윗방(안방의 옆방)에서 지냈다. 우리 가족은 안방에서 다 같이 지냈다. 대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던 오빠 둘이 집에 올 때면 좁은 방이 꽉 찼다. 아버지는 국숫집 부부가 움집을 하나 얻어 나갈 때까지 기다려줬다.
내 고향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 2구는 ‘당골-담곡’이라 불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다. 거기서 우리 아버지가 제일 신식이었다. 대전 가서 택시 기사 해서 소 한 마리 끌고 오면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여자라도 고등과(고등학교)는 나와야 한다”는 말씀을 입이 닳도록 하셨다.
다행히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했다. 글 읽기를 갓 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교과서들을 읽고 또 읽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는 교실마다 5권씩 비치된 동화책을 전부 빌려다 읽었다. 그래도 나는 읽을거리가 고팠다. 다락으로 기어 올라가 오빠들의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래도 심심하면 당시 대학생이었던 큰오빠가 읽고 쌓아둔 사상계, 시사영어의 영화해설, 조선시대 야화집, 고교종합생물 등도 읽었다.
오죽했으면 어릴 때 별명이 ‘서당도령’이었겠는가. 학교 갔다 와서도 심부름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고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붙여 준 별명이었다. 한번은 개울가로 어머니와 빨래를 하러 갔는데 아주머니들이 내 흉을 보고 있었다. “연수, 왜 서당도령이라고 부르는 애 있자녀. 갸는 못 쓰겄슈. 핵교 댕겨와서도 책상다리 뻗쳐놓고 공부만 한다네요. 그런 지지배를 어따가 써먹겄슈.”
그 말을 들은 엄마가 빨랫감을 물에 던져 넣으며 일갈을 날렸다. “냅둬유. 우리 연수는 호미자루 안 잡고 펜대 잡고 살 건 깨로 냅둬유.” 내가 1978년 문단에 시인으로 등단했을 때 어머니의 이 말이 떠올랐다. 그때 딸에 대한 어머니의 꿈이 내 인생에 대한 예언이었구나.
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우리 동네엔 고등학교가 없어 논산 시내에 있는 샌뽈(St. Paul)여고로 갔다. 마침 큰오빠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큰오빠 집에 살며 학교에 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수녀의 길을 걷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