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 北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입력 2020-05-04 04:04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잠행 20일 만에 공식 활동에 나섬으로써 억측이 무성했던 건강 이상설을 잠재웠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북한에 특이 동향이 없다는 확인을 반복했지만 국내외적으로 각종 주장이 난무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 미국도 연일 한반도 상공에 감청 정찰기를 띄웠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다’며 여운을 남겼었다. 김 위원장의 건재로 한국의 대북 정보능력과 사회적 위기관리능력은 시험대에 올랐다.

북한의 태도도 이례적이었다. 김 위원장이 소위 ‘태양절’ 행사에 불참하고, 북한이 그토록 거부하는 한·미 연합공중훈련이 실시되고 미군의 전략자산이 한반도 주변에 전개되는데도 침묵을 거듭했다. 이는 김 위원장의 통치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합리적 의심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실제 건강에 일시적 이상이 생겼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부 김일성과 부친 김정일과는 다른 ‘김정은식 새로운 길’을 실험하는 매우 의도된 독자행보화의 일환일 수도 있다.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지만 정부 발표를 믿고 근거 없는 억측과 주장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의 변고와 관련해 전략적 대비의 필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후계 체제는 둘째 치고 실질적 핵보유국인 북한의 변고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를 초래할 것이 자명하다. 핵무기 관리를 둘러싼 미·중 간 대립의 증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안보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은 민주적 선거 절차를 통해 지도자를 선택하는 국가가 아니므로 절대 권력자의 건강 문제나 권력 향배는 관심 대상일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 유고나 북한 변고를 바라는 차원이 아니라 비민주적 세습형 권력구조의 선천적 약점으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게 필요하다. 소위 ‘백두혈통’의 권력 유지와 승계, 세습 엘리트에 의한 집단지도체제 구축, 군부 강경파들의 핵무기 장악 경우 등 시나리오별 대응 태세도 마련돼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의도 파악도 중요하다. 북한 핵과 미사일을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는 미국은 북한 지도부의 변화와 관계없이 ‘비핵화’ 임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고수한다.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패권 확보를 위해 북한 붕괴를 막으면서 대북 영향력 유지를 위한 개입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미 본토에 도달하지 않는 핵과 미사일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할 수 있고, 중국 역시 대북 영향력 복원에 성공했기에 양측이 우리 의도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의 대북·대미 관계도 딜레마다. 북·미 협상이 여의치 않자 북한은 신형 탄도미사일과 방사포 등으로 한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전략으로 전환했다. 미국과의 공조도 여의치 않다. 미 의회조사국(CRS)의 ‘한·미 관계 보고서’는 양국 간 주기적 긴장의 원인이 한국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보다 북한에 더 빨리 양보하는 데 우호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선언 2주년을 맞아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남북 협력의 길’부터 찾겠다고 하자 미 국무부가 남북 협력은 북한 비핵화 진전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반도 최대 난제인 비핵화의 난항은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일단은 북한이 ‘북한식 비핵화’ 방식 외에는 다른 의지가 없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김정은식 새로운 길’의 전개 방향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특히 북한이 내부 결속용으로 대남 도발을 자행할 가능성에 대한 군사적 응징태세 구축과 확고한 안보태세 확립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강준영 한국외대 교수·국제지역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