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시작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었다. 남편 사이먼(버티 카벨)의 불륜과 맞닥뜨린 젬마(슈란느 존스)에게 두개의 선택지가 생겼다. 처연한 분노를 토해낼지, 우아한 가면을 쓸지. BBC ‘닥터 포스터’가 흔한 불륜 드라마로 치부되지 않았던 이유는 아내의 서사를 피해자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어든 와인잔을 깨지 않고 차분히 내려놓으며 젬마는 반전을 모의했다. 젬마의 적극성을 빠른 전개로 잡자 시청자는 매료됐다. 의사인 젬마는 자신의 환자를 동원해 남편을 미행했고, 남편의 친구를 유혹해 정보를 빼돌리며 진흙탕을 준비했다.
JTBC ‘부부의 세계’의 선우(김희애)와 태오(박해준)는 반격하는 젬마, 주구장창 몰염치한 사이먼과 큰 궤를 같이하면서도 디테일에는 차이를 뒀다. 가장 큰 특징은 원작의 자극적 표현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한국 특유의 정서를 살렸다는 점이다. 원작 시즌2 결말에서 사이먼은 모든 걸 잃고 아들인 톰(톰 테일러) 앞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다. 톰이 집을 나가게 된 계기다. 아울러 톰이 아빠의 불륜 사실을 알도록 덫을 치는 젬마와 달리 선우는 아들 준영(전진서)이 알까봐 전전긍긍한다.
두 작품 모두 갈등 중심에 아들이 있다. 시즌3을 앞둔 원작은 부모의 극단에 지쳐 집을 나간 톰의 행방이, ‘부부의 세계’ 역시 준영이 가장 큰 변곡점이다. 다만 준영은 원작보다 아빠를 더 갈망하는 것으로 그려졌고, 두 나라의 환경적 차이에 따라 다른 전개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경우 만 16세는 독립이 가능하지만 한국은 만 19세가 되어야 독립할 수 있다. 따라서 갈등의 키를 쥔 준영이 톰처럼 집을 떠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원작은 시즌3를 열어뒀으나 ‘부부의 세계’는 마침표가 필요하기도 하다.
원작에는 없는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뭘까. 선우와 야릇한 관계에 놓인 윤기가 어떤 카드를 쥐고 있을지도 관전 포인트다. 지금까지는 선우를 조력하는 듯 보였다.
지난해 12월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결혼이야기’를 ‘맛’에 빗대자면 ‘순한 맛’이다. ‘부부의 세계’처럼 불륜과 그로 인한 부부의 파경을 그리지만, 선정적이지 않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최고작이라 부를 만한 이 영화는 이혼을 앞둔 부부의 삶을 현미경을 보듯 세세히 들춰내는데, 그 과정이 담백해서 더 깊은 풍미를 자아낸다.
주인공은 LA에서 잘나가던 배우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연극 연출가 찰리(아담 드라이버). 이들은 결혼 후 뉴욕에서 아이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균열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뉴욕 브로드웨이 입성이 꿈인 찰리는 LA에 돌아가자는 니콜의 제안을 거절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찰리가 극단 동료와 잠자리를 갖는다. 찰리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니콜은 조금씩 깨닫는다. 자신이 찰리에게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이후 영화는 아들 헨리의 양육권을 두고 벌이는 부부의 지난한 이혼 소송을 쫓는다.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 펼쳐진다. 양측 변호사들은 상대에게 책임을 조금이라도 더 지우려 목소리를 높이고, 니콜-찰리는 서로의 약점을 들춰낸다. 하지만 법정을 나온 이들은 여전히 애틋하다. 니콜은 식당에서 찰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척척 시켜주고, 찰리도 도움이 필요한 니콜을 위해 한밤중에도 달려간다.
현실 속 관계도 무 자르듯 딱 나뉘지 않는다. 살을 맞대는 부부라면 더 그렇다. “낮에는 법원에서 상대를 모욕하다가도 집에 가서는 함께 아이의 숙제를 봐주는 게 이혼”이라는 바움백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부부관계가 가진 모순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서로의 진심을 조금만 빨리 알아챘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의문과 함께. 슬픔과 분노, 행복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가 관객을 단숨에 빨아들인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