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38절은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이다. 이 말씀으로 목숨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하라는 내용을 묵상해 보자.
누가복음에는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어느 마을을 지나시는데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일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마리아가 얄미워 보인다. 일만 하던 마르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 “예수님, 마리아에게 일을 도우라고 말해 주세요.” 그러자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일, 합당한 일을 선택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도리어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다.
둘의 차이는 뭘까. 마르다는 급한 일을 선택한 것이고 마리아는 중요한 일을 선택했다. 과연 그럴까. 사실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선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의 기준이 달랐을 뿐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음식 대접을 하고 싶어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다. 어떤 사람은 돈 버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반면 돈이 많지 않아도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해야 한다. 수 년 전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친구는 어머니에게 큰 사랑을 받던 아들이었다. 매일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고 보약과 용돈을 아끼지 않던 효자였다. 그렇게 사랑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서 돈도 많이 벌게 됐다. 더 효도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삶의 큰 의미가 사라지고 말았어. 이제 뭘 위해 살아야 하나.” 이 말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도 살아갈 목적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보통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가족과 국가, 출세와 연관돼 있다. 그것들이 다 사라졌을 때 우리는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패망을 선언한 사람이었다. 유다는 망해야 하며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마치 바빌론이 유다의 희망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결국 예레미야의 말대로 나라는 망했다.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져 버렸다.
유다에는 남은 것이 없게 됐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중요한 일을 다한 것이었다. 바빌론에서도 예레미야를 대접하겠다고 불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신의 영광이 보장된 바빌론에 가지 않았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잔해에 남았다. 모든 것이 다 무너졌어도 예레미야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자신의 고향과 삶의 터전,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다. 마리아가 선택한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마르다라는 이름의 뜻은 ‘여주인’이다. 마르다는 주인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자기 노력으로 손님을 기쁘게 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영접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하는 일이다. 성공보다 앞서는 문제이며 살고 죽는 문제보다 선행돼야 하는 문제다. 나라의 존망을 뒤로하는 인생의 본질인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영접하시길 권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은혜 안에서 사는 인생이 될 것이다.
이창우 박사 (선한목자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