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예의를 다해 그린 도시 빈민들의 애환

입력 2020-04-30 20:18 수정 2021-11-04 16:47
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의 배경이 되는 남일동의 모습은 저 사진처럼 황량할 것이다. 소설가 김혜진은 재개발의 광풍마저도 빗겨간 달동네 남일동을 배경으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다. 픽사베이

지난주에 소개된 도서 케이틀린 도티의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이 지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유머다. 20대 장의사인 필자는 시체를 대하며 한때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또 누군가에게 최선이었던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런 그에게 위트와 유머는 시신에 대한 예절을 지키는 행위가 된다.

오늘날 장의사의 전문성을 상당 부분 빌려 진행되는 장례의 풍습도 결국 고인과 유족 모두를 위한 예의의 행사일 것이다. 슬픔의 정조여야 할 장례식장 곳곳에서 그를 애도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게 그다지 불경스럽지 않은 이유다. 이미 죽은 이에게까지 예의를 다하는 우리의 전통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리하여 또한 얼마나 문명적인가.

이러한 문명은 때로 산 사람에게 가혹하다. 특히 김혜진 소설의 인물들에게 그렇다. 대표작인 ‘딸에 대하여’를 비롯해 ‘중앙역’ ‘어비’ ‘9번의 일’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인물은 모두 최선을 다해 예의를 다해 삶을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이라 인사를 건네는 건 무례한 일일지도 모른다. 김혜진의 인물들이 그걸 몰라서 최선을 다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 시체가 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이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이후에 김혜진 신작 ‘불과 나의 자서전’을 읽는 건 그래서 자연스러운 곤욕이다.


죽음의 편안함과 삶의 불편함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죽어 편안해진 육신 앞에서 오밀조밀 빛나던, 로스앤젤레스 출신 20대 장의사의 문장에서 빠져 나와 살아남아 번잡스럽고 고단한, 대구 출신 30대 소설가의 서사로 진입한다. 이러한 읽기 앞에서는 마음을 더욱 단단히 먹을 수밖에 없다.

‘홍’과 ‘주해’는 남일동 초입의 약국에서 우연히 만나 가까워진다. 둘의 이야기는 오래된 골목의 꼬마들처럼 만나고 헤어지며 타래를 이어간다. 홍은 어린 시절을 되짚으며 남일동을 떠나려 각고의 노력을 거듭했던 부모님의 기억을 떠올린다. 주해는 남일동의 구석에 터를 잡고 각종 민원을 성사시키고, 벼룩시장을 만들고 사람들의 갖가지 청을 들어주며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애쓴다. 홍은 남일동에 남으려는 주해와 남일동을 떠나려 했던 부모님 모두를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홍의 자서전은 두 궁금증이 해결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끝에 혐오의 감정을 만나리라고는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주해는 혐오와 배제의 상징인 남일동에서조차 버티지 못하고, 홍은 그런 남일동을 불태워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소설의 주인공은 직장 내 따돌림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에게 기댄 채 알레르기성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홍도, 모종의 이유로 후미진 동네에 새로 이사와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우며 동네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해도 아닌, 그들이 만나고 사는 동네 ‘남일동’인 것처럼 보인다. 남일동은 중앙동과 경계선을 두고 있으며 달산을 끼고 있다. 몇 번이고 재개발이 계획되었다 무산되길 반복했다. 골목에는 가로등도 없고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남일동은 가난으로 고립된 섬 ‘남일도’가 되고 그곳의 아이들은 난민이 아닌 ‘남민’이 된다. 모퉁이에는 몰래 버린 쓰레기가 놓여 있고, 모퉁이 건너 이웃은 타인에게 배타적이다. 앞서 죽음의 과정에서도 있었던 예의와 문명이 이들에게는 부족해 보인다.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테지만,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그래서 지금 소설을 읽는 우리도 우리 곁의 어느 동네, 어느 사람을, 어느 지역과 성별과 계급을 그리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김혜진이 그리는 도시 빈민은 누구 하나 게으른 사람이 없다.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앞서 읽은 책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닮았다. 겸허와 인내 혹은 무지와 광기. 송에게 여덟 살 수아가 남긴 카드에는 엄마 주해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재개발 아파트가 색연필로 그려져 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아파트를 향한 우리의 무지와 광기를. 김혜진의 소설은 위트와 유머 하나 없이 이를 까발려 보여 준다. 마치 그것이 소설가의 예의인 것처럼. 예의를 다해 소설을 쓰는 김혜진이 있어 다행이다. 시체가 되기 전 이 소중한 다행을 읽을 수 있음이 행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