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바뀐 정치지형… 문 대통령-야당, 협치냐 대치냐

입력 2020-05-02 04:04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이튿날 야당 당사 4곳을 찾았다. 오전 현충원 참배 이후 첫 일정으로 취임 선서도 하기 전이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에 이어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을 차례로 방문했다. 여소야대, 다당제였던 20대 국회에서 야당과 협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파격 일정이었다.

하지만 ‘허니문’은 짧았다. 임기 초반 이후로 청와대와 제1야당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여당에서는 “발목만 잡는 제1야당”, 야당에서는 “문재인 탄핵”이라는 날선 말이 오갔다.

4·15 총선은 문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 프레임을 완전히 바꿨다. 국회 권력은 180석을 차지한 슈퍼 여당으로 넘어갔다. 문 대통령과 야당의 관계는 여대야소, 거대 양당 구도 등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 지형을 맞게 됐다.

협치 아닌 대치

청와대는 21대 국회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 민생은 ‘속도전’, 정치 현안은 ‘지구전’으로 요약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문 대통령의 남은 임기 2년을 잘 이끌어가기 위해선 야당의 협조와 협력이 필요하다”며 “경제 살리기, 민생 현안, 국민의 요구가 있는 개혁은 신속히 해야 한다. 하지만 여야나 국민 동의가 모이지 않는 것은 야당과 협의해서 숙성시켜 가겠다”고 했다. 국회는 바뀌지만, 여야정협의체 등 기존 대화의 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청와대 설명이다.

문 대통령은 20대 국회에서도 대탕평, 협치를 대원칙으로 강조했다. 여야정협의체를 가동하고, 여야 대표와의 오찬·만찬 회동도 종종 가졌다. 하지만 정치 현실은 ‘언제나 대치’였다. 국회 인사청문회 때마다 문 대통령과 통합당은 충돌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장관 후보자들에 대해 제1야당은 번번이 청문보고서 채택을 거부했고, 문 대통령은 임명 강행으로 맞섰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 당시엔 문 대통령과 야당의 갈등이 임계점에 다다랐고, ‘서초동’과 ‘광화문’의 국론 분열로 이어졌다. 20대 국회는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충돌, 비례위성정당 창당 경쟁 등으로 최악의 국회였다는 평가가 많다. 통합당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과 문 대통령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 대통령 스스로도 지난 1월 정세균 국무총리 임명 당시 “지금 국회는 막무가내로 서로 싸우기만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오히려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기능만 하고 있다”며 “대통령도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21대 국회는 정치 지형이 완전히 달라졌다. 압도적 의석을 가진 여당이 개헌 외에는 사실상 모든 법안을 처리할 힘을 갖게 됐다. 여기에다 그동안 중재 역할을 해온 제3당이 소멸하면서 거대 여당과 제1야당 사이의 완충지대는 사라졌다. 범여권인 정의당이 있지만, 원내교섭단체는 민주당과 통합당 둘뿐이다. 국민이 총선을 통해 여당과 문 대통령에게 힘을 몰아준 만큼 국회 운영의 책임도 더 무거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공수처가 첫 고비

문 대통령은 총선 사흘 뒤인 4월 2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야당도 지혜와 역량으로 경쟁하면서 국난 극복에 함께 협력해 주시기를 당부드린다”며 야당과 소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실제로 총선 이후 긴급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에 여야가 합의하기도 했다. 코로나19 대응 속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대치의 ‘조정기’를 맞은 셈이다.

향후 정국은 청와대와 여당이 국정 과제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야당의 방향도 달라질 전망이다. 21대 국회의 향배를 가늠할 첫 번째 리트머스 시험지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당이 국회 개원 직후부터 공수처 등 검찰 관련 입법에 드라이브를 걸 경우 통합당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도 내년 4월 재·보궐 선거 때까지 여야의 정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문제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청와대와 여당이 어떤 깃발을 내걸고 목표를 세울 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며 “코로나19 사태가 여야에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상황인데, 이후 여권이 정치 이슈를 전면에 밀어붙일 경우 야당도 반발할 수밖에 없다. 구조적으로도 다당제일 때보다 충돌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통합당의 리더십 변화도 주목할 부분이다. 20대 국회에서 통합당은 홍준표, 황교안 전 대표 등 이념 성향이 강한 지도부가 강경 투쟁을 이끌었다. 특히 황 전 대표는 재임 시절 삭발과 단식, 장외투쟁 등을 동원해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

하지만 통합당 내부에선 총선 참패 이후 ‘아스팔트 보수’ ‘태극기 세력’과는 거리를 두자는 반성이 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이 코로나 경제위기의 해결을 전면에 내세운 상황에서 ‘합리적 보수’가 통합당의 지도부가 된다면 경제 분야에서 협치의 여지를 찾을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거대 양당제에서 정국을 운영하기가 오히려 쉬울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기대도 청와대 내부에서 나온다. 한 청와대 참모는 “20대 국회에선 여러 정당의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했으나 21대 국회에선 야당과의 협상 창구가 단일해 관계 맺기가 쉬워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