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목사님’이 이끄는 교회, 음악으로 세계 선교를 꿈꾸다

입력 2020-04-30 00:07 수정 2020-04-30 00:33
CCM교회의 CCM앙상블이 2018년 11월 서울 성북구 수문교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CCM교회 제공

“1987년 개관한 뒤 저기서 공연도 여러 번 했죠.”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앞에서 27일 만난 김토마스(59) 목사가 음악당과 오페라 하우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김 목사는 CCM교회를 세우기 전까지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한 성악가였다. 성악가 이력을 둔 목사가 담임이니 교회 이름을 ‘현대 기독교음악’을 뜻하는 CCM과 연결짓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CCM교회의 CCM은 그리스도중심선교교회를 뜻하는 ‘크라이스트-센터드 미션 처치(Christ-Centered Mission Church)’의 영어 약자다.

예배당보다 선교센터

CCM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선교를 위해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선교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로 2016년 9월 설립됐다. 네트워크 안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일꾼도 발굴하기로 했다. 교회엔 음악과 문화를 중심으로 국내외 선교 사역을 하겠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에 등록한 것도 제한 없는 사역을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주일 예배는 소극장을 빌려 드리면서도 선교센터를 만들겠다며 한창 공사 중이다.

잠원동 아이노스아트홀에서 시작해 2018년부터 예술의전당 맞은편 칸타비노라에서 주일을 지킨다. 선교센터는 다음 달 남부터미널 근처에 문을 연다.

떠돌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선교 사역은 활발했다. 아이티와 미국, 필리핀, 러시아, 일본 등에서 문화선교를 펼쳤다. 선교현장에서 ‘음악’이 복음의 좋은 매개체이자 통로가 된다는 것도 확인했다.

첫 사역지인 아이티에선 100여명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헨델의 ‘메시아’를 공연했다. 2010년 지진 이후 혼돈 상태인 아이티의 4개 지역을 돌며 주민들을 위로했다. 지난해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한·일 관계가 경색됐을 때도 도쿄 등을 돌며 현지주민과 한국 선교사들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의 작고 열악한 교회도 찾아 음악회를 열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흥의 불씨를 놓고 있다.

CCM교회 성도들이 2016년 12월 첫 선교지인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미국 뉴욕·뉴저지의 음악인 및 현지인들과 협연하는 모습. CCM교회 제공

이 같은 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서울대 성악과 출신의 김 목사와 김희수 지휘자가 이끄는 CCM앙상블의 헌신이 있었던 덕분이다. CCM앙상블 단원들은 전문 음악가들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헌신된 기독교인들이다. 음악에 열정이 있는 아마추어 음악가, 선교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된 음악가들도 함께한다.

CCM교회에 음악가만 출석하는 건 아니다. 새로운 예배 형식을 고민하던 사람들이 CCM교회를 찾았고 선교사역을 할 때면 현장 스태프로 참여했다.

음악의 길은 하나님의 섭리

모태신앙인 김 목사는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음악선생님을 만나면서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김 목사가 흔들린 건 300명 넘는 회원을 둔 교회 고등부 회장이 되면서다. 교회 어른들과 부딪히면서 교회에 실망한 일이 많았다. 그때 음악 선생님이 김 목사의 실력을 알아보고 음악을 권유했다. “하나님께 음악을 통해 영광을 돌리겠다”는 핑계를 대며 도피하듯 음악을 선택했다.

서울대 성악과에 들어갔고 졸업 후엔 1983년 10월 창단한 대우합창단에 들어가 87년 개관한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다. 합창단이 해체돼 89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줄리어드 음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예일대에서 최고연주자(AD)과정을 수료했고 뉴욕주립 스토리브룩 대학에서 음악박사 과정을 밟았다.

베를린 필하모니홀 평화음악회, 뉴욕 카네기홀 음악회, 샌프란시스코 허브스트 극장 초청 음악회 등에 출연했고 미국 캐나다 등 북미와 유럽, 남미, 아시아 등에서 바리톤 연주자로 활동했다.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건 동부개혁장로교신학교 신학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중 북한을 방문한 뒤다. 2002년 당시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갑에 맞춰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연주자들을 초청했다. 북한에는 1990년대 후반 대기근으로 촉발된 ‘고난의 행군’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다. 최고급인 고려호텔마저 난방이 안 될 정도였다. 김 목사는 고려호텔에 1주일 동안 머물며 분단의 현실과 불쌍한 북한동포들 때문에 밤새 울며 기도했다.

조선기독교도연맹 소속 봉수교회에서 가능성을 봤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찬송 412장)’의 1절을 부르자 어두운 얼굴로 앉아있던 성도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CCM교회 김토마스 목사. 송지수 인턴기자

그는 “성악을 하면서 하나님께 늘 빚진 마음이 있었다. 평양에서 연주를 하다가 하나님이 ‘완전히 올인하라’고 콜링하셨다”고 말했다.

2007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들어갔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7년간 합동 측 교회 강도사와 전도사로 사역했다. 2014년 미국의 고든콘웰신학교에서 설교학으로 문화신학(ThM) 과정을 공부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CCM교회를 개척했다.

김 목사는 인터뷰 동안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해야 할 게 많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그의 당면 목표는 CCM교회를 통해 문화선교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한때 음악의 길로 인도한 선생님을 원망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교회가 되고 싶어요.”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