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니는 귀한 손님이 집을 찾아오거나 새 학년이 되어 바뀐 담임선생님께서 방문하시면 기르던 닭을 잡아 백숙 요리로 대접하곤 했다. 일 년이면 손님들이 달포에 한 분 정도는 찾아오셨고 자식 셋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한 해 닭장을 나와 백숙이 돼야 할 닭들이 얼추 여남은 마리는 됐다.
엄니는 닭 잡는 일을 꼭 장남인 내게 시키셨다. 나는 그 일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감히 엄니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으므로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그 일을 치러 내야 했다. 닭 잡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안다. 한참을 쫓고 쫓아야 겨우, 모진 실랑이 끝에 잡을 수 있었다. 그러느라 애초에 목표한 닭을 포기해야 할 때도 부지기수였다. 그리하여 대개는 그날의 운에 의해 닭의 수명이 결정됐다.
그날의 나는 닭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어린 폭군이거나 절대자가 됐다. 내가 문을 여는 순간 닭장은 일순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됐다. 본능으로 위험을 감지한 닭들은 모이를 쪼던 부리를 치켜들고 부리나케 발을 움직여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숨 막힐 듯 고요가 닭장 안에 가득 고였다.
닭들은 내가 들어서면 아연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욕쟁이 할머니가 들어설 때는 천하태평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 가축들은/ 할머니 욕설을 퍽이나 좋아하였다/ (중략)/ 구시렁구시렁 할머니는/ 돼지에게, 소에게, 토끼에게, 닭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한 번도 욕을 거르지 않으셨다.”(졸시, ‘할머니의 욕설’ 일부) 닭들은 조용히 들어서는 나는 무서워했지만 시끄럽게 욕설을 퍼부어대며 들어서는 할머니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장날 엄마 치맛단을 놓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닭들이 나를 피해 달아난다. 나는 겨냥한 닭을 향해 저승사자처럼 달려든다. 겨냥한 닭은 좀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점차 지쳐간다. 처음 겨눈 닭을 포기하고 아무 닭이나 잡기로 한다. 오랜 분탕질 끝에 운수 사나운 닭이 잡힌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닭장 안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살아남은 닭들이 모이를 쫀다. 내가 가까이 가도 달아나지 않는다. 천연덕스럽다. 돌대가리들. 방금 전의 소란을 벌써 잊었다. 아니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어릴 적 고향(부여)에서는 윗말에 있는 저수지의 수문을 열고 나온 물과 이 골짝 저 골짝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만나고 모여 이룬 냇물이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해 시오리쯤 완보하다가 금강 하류에 합수되곤 했다. 냇물에는 지금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붕어 갈겨니 피라미 버들개 금강모치 돌고기 쉬리 납지리 큰줄납자루 모래무지 새미 미꾸라지 종개 송사리 메기 등속의 어족이 아옹다옹 살아가고 있었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 족대나 어항, 혹은 손으로 수초를 뒤져 잡은 것들로 식구들은 궁한 입을 달래고는 했다.
천렵을 하는 동안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냇물에는 검붉은 흙물이 일고는 했다. 그러나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난 뒤 이내 투명한 거울로 돌아간 냇가에는 살아남은 물고기들이 겅중겅중 물속을 걸어 다니는 구름의 연한 속살을 파고들거나 척척 늘어지게 드리운 물푸레나무 가지들 사이를 넘나들며 그늘의 평화를 유영했다.
추억의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고 여태껏 남아 있는 이 두 가지 사건은 내게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도 이런 닭 같은, 물고기 같은 존재들이 없다고 나는 감히 주장하지 못한다. 망각에 익숙한 존재들.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다. 올해로 세월호 6주기를 맞았다. 우리는 지난 역사가 남긴 상처를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망각에 저항할 줄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