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받는 ‘국가채무 40%대 사수’… 단계적 증세도 고려해야

입력 2020-04-28 04:03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큰 정부가 부상할 것이 확실하다. 민간 침체로 한동안 경제를 지탱할 곳은 정부밖에 없어 나랏돈을 대거 투입하는 재정 팽창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주요국은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달하는 돈을 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재정건전성을 위해 우리나라가 금지옥엽처럼 여겼던 ‘국가채무비율 40%대 유지’ 정책도 더는 지탱하기 어려워졌다.

경제 규모가 작고, 기축통화국이 아닌 탓에 주요국과 똑같은 지출이 불가능하다면 한국식 모델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위기 시 국가채무는 늘리되 증세도 동시에 진행하며 우리나라에 맞는 중장기 재정 로드맵을 세우자는 얘기다.

균형 예산 깨지는 전 세계

주요 국가는 코로나19를 재정 정책으로 돌파하고 있다. 경제가 멈춘 상황이라 ‘나랏돈’이 유일한 대안이 되고 있다. 수입이 들어온 만큼 지출을 한다는 균형 예산 이론은 사실상 깨지고 있다.

국가채무비율이 이미 100%가 넘는 미국(106.9%) 일본(224.1%) 프랑스(122.5%) 등은 GDP의 최대 10%에 달하는 빚을 추가로 지고 있다. 주요국 재정 대응 규모는 미국 2조2343억 달러(2758조2433억원), 일본 39조5000억엔(453조1440억원), 프랑스 450억 유로(59조8801억원) 등이다.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던 유럽연합(EU)조차 재정 준칙을 던져버렸다. 지난달 EU 재무장관들은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각각 GDP의 3% 이하, 60% 이하로 유지하는 원칙을 일시 중단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5일 “코로나19 대응으로 글로벌 재정적자는 GDP 대비 지난해 3.7%에서 올해 9.9%로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가채무비율 40%대 도전 받는 韓

한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대응 1차 추가경정예산과 재난지원금 지급 2차 추경에는 총 26조원(1차 11조7000억원, 2차 14조3000억원)이 투입된다. 이는 지난해 명목GDP(1967조4000억원)의 약 1% 규모다. 3차 추경을 약 30조원대로 추진한다면 GDP의 약 3%다.

주요국 대비 예산 투입 규모가 작은 건 국가채무비율 40%대 유지 탓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 국가채무비율은 109.2%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양호함에도 빚을 더 늘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한국이 주요국과 똑같이 빚을 늘리는 건 불가능하다. 주요 국가는 큰 경제 규모와 기축통화국의 장점으로 빚을 감당하고 있다. 개인도 부자면 많은 대출이 가능하듯 한국보다 GDP가 큰 미국(약 14배)과 일본(약 4배), 프랑스(약 2배) 등은 경제 규모를 앞세워 빚을 늘리고 있다. 국가채무비율은 GDP와 연동돼 움직이기 때문에 경제 성장시 다시 감소한다.

또 주요국은 기축통화국 위치도 활용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간접적으로 정부의 빚(국채)을 매입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돈을 찍어 재정적자를 메우는 것이다. 장기물을 중심으로 일본 중앙은행은 총 국채의 약 80% 이상, 미국은 약 60%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학계에서는 현대화폐이론(MMT)도 부상했다. 재정적자는 위험한 것이 아니며 돈을 찍어서 충당하면 된다는 이론이다.

반면 한국은 경제 규모가 작다. 가만히 있어도 저성장에 따른 수입 감소, 복지 지출 증가 등으로 빚이 폭증할 위험이 있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탓에 중앙은행의 도움도 한계가 있다.

증세 필요성 고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도 재정의 필요성이 커지는데 무조건 국가채무비율 40%대를 고수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이후 한국식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주요국의 ’헬러콥터 머니’ 살포처럼 무한정 빚을 늘리기 어렵다면 과감한 재정 투입 후 이를 다시 되돌리는 재정 준칙도 함께 세우자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게 증세다.

그동안 정부는 국민 저항 등을 이유로 증세는 사실상 금기시돼 왔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국가 경제 상황이 달라진 만큼 재정건전성 회복이 어려우면 단계적 증세 방안을 마련해 공론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우리나라 여건상 국가채무비율을 마냥 높일 수는 없다. 다시 재정 수지 균형을 이루는 후속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당장 증세를 할 수 없겠지만 중장기 계획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는 “이번 기회에 한국식 재정 운용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며 증세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한국판 뉴딜 등에 대한 빚 증가에 대비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솔직히 논의해야 한다”며 “중장기 증세 외에 지출 개혁 등을 단계적으로 제시하는 큰 틀의 국가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기백 학국재정학회장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국가채무비율 40%대에 연연해선 안 된다”며 “위기를 벗어난 뒤에는 중장기 지출 조정, 세입 기반 확대 등을 종합적으로 추진하면서 재정건전성을 위한 노력에 힘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질(質) 좋은 지출도 중요하다. 돈이 효과를 발휘해 경제가 살아나야 수입과 GDP 증가, 국가채무비율 감소 등의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 김소영 서울대 교수는 “국가채무비율 40%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급할 때는 써야 하는데 효과가 중요하다”며 “효과 없는 지출은 줄여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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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전슬기 이종선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