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발 시험대 선 한국은행… 옛 울타리 탈피 역할론 커진다

입력 2020-04-28 04:0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중앙은행의 역할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한국은행 역사에 있어 하나의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21일 서영경 금융통화위원이 취임하며 밝힌 소회다. 부총재보까지 지내고 퇴임한 뒤 약 4년 만에 한은으로 돌아온 서 위원은 “앞으로도 민간에 대한 원활한 유동성 공급을 위해 추가적인 정책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며 “경기 부진과 고용불안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 전례 없는 통화정책이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이미 ‘전례 없는 통화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0%대 기준금리와 양적완화(유동성 직접 공급), 증권사·보험사 직접 대출은 최근까지도 실현되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던 대응이다. 코로나19가 몰고 온 경제적 충격은 한은이 그동안 넘어서길 두려워하던 울타리들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했다.

역사적으로 중앙은행은 경제 위기 속에서 역할을 확장해왔다. 중앙은행의 원조격인 영국 영란은행은 1694년 세워졌지만 1866년 영국 최대 은행 파산 이후에야 금융위기 때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1907년 금융위기가 지금의 연방준비제도(연준)를 태동시켰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사고팔며 시중 금리와 유동성을 조절하는 공개시장조작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전까지만 해도 ‘넘어선 안 될 선’이었다. 중앙은행끼리 통화를 교환하는 통화스와프는 1960년대 연준이 쿠바 위기 등에 따른 자금 유출에 대응하려고 유럽 중앙은행들과 계약을 맺은 게 최초다. 정책금리를 0% 수준까지 낮추고도 불황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던 일본은 2001년 처음으로 양적완화를 도입했다.

중앙은행 역할 확대 요구는 경기침체기에 두드러진다. 정부와 시장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니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앞장서 실물경제에 생기를 불어넣어 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물가관리자)에서 벗어나 ‘디플레이션 파이터’(경기부양자)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지난 20일 조동철 금통위원은 이임사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쌓아 온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한국은행의 명성이 혹시 이제는 극복해야 할 유물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주요국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 파이터로 나선 지 오래라는 사실은 한은처럼 기존 원칙을 고수하려는 중앙은행을 더욱 압박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유럽 중국 등은 경기 부양을 위해 앞다퉈 국공채를 사들이며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일부는 금리를 제로나 마이너스 수준까지 내렸다. 미 연준은 2011년 12월 실업률을 정책금리 결정 기준으로 공식화하기도 했다.

여전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한은 역시 자신을 경기회복이나 경제구조 개혁의 조력자로 인식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실물경제 부진이 이어지던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자리에서 “경기 회복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통화신용정책을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수단이다. 한은은 통화안정증권과 통화안정계정을 활용하거나 국채나 환매조건부채권(RP) 등을 사고팔며 유동성을 조절한다. 한국판 양적완화로 불리는 무제한 RP 매입, 공개시장운영 대상증권·기관 확대 등 코로나19 위기 대응책은 대부분 기존 수단의 운용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시장 요구보다는 더디지만 한은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행동반경을 넓히고 있다. 증권사와 보험사에도 회사채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금융안정특별대출제도는 한은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내놓은 대책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통성과 안전성이 떨어진다”며 회사채를 끌어안는 방식의 유동성 공급에 부정적이었다. 한은은 지난 9일 “미 연준과 같이 정부의 신용위험 부담 하에 한국은행이 특수목적기구(SPV)에 유동성을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한 대안”이라며 회사채 직접 매입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지난 22일 정부는 SPV를 세워 저신용 등급을 포함한 회사채·기업어음(CP) 등을 20조원 매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한은이 미 연준과 비슷한 방식의 기업 지원책을 고민하는 점은 최소한 AA급 이상의 기업 도산 확률을 크게 낮추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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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