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9월 학기제 단상

입력 2020-04-27 04:02

2년 전 미국에 있을 때 일이다. 집 앞 공터에서 초등학교 4학년 한국 아이들이 싸우고 있었다. 여러 명이 2명을 에워싸고 나름대로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서열 싸움이었다. 한 아이가 “왜 넌 나보다 1살 어린데 형이라고 안 부르냐”고 했다. 그러자 한 해 늦게 태어난 아이가 “같은 반인데 네가 왜 형이야”라고 대꾸하며 “우린 친구 아니냐”고 했다. 또 다른 아이가 “너는 한국 사람 아니냐”고 하자 1살 아래 아이는 “여긴 미국이야”라고 반발했다.

미국은 9월 학기제다. 그래서 한국과 다르게 9월생부터 이듬해 8월생까지 같은 학년이 된다. 이 아이들은 이 때문에 싸운 것이었다. 분명 한국에선 형, 동생인데 미국에 와서 같은 반이 되니 겪는 혼란이었다. 오랜 논쟁 끝에 나이가 어린 두 아이 중 1명은 한국 스타일에 승복했다. 반면 다른 아이는 수긍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아이들 부모 사이에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결국 부모들도 저마다 자기 아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다 서먹서먹해졌다.

최근 일부에선 ‘9월 학기제’ 공론화를 시도하고 있다. 김경수 경남지사,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9월 학기제를 주장하는 주요 이유는 ‘선진국 대부분이 9월 학기제를 실시하고 있다’ ‘외국과 학기가 맞지 않아 한국 학생들이 손해를 본다’ 등이다. 특히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등교 수업이 늦어지고 있으니 이번이 ‘천재일우’의 기회라고도 한다. 김 지사는 “3월에 개학하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 우리나라를 제외하면 일본과 호주밖에 없다. 긴 여름방학 동안 새 학년을 위한 충분한 준비시간도 가지고 지금처럼 모호한 2월 봄방학 문제도 해결하고 다른 선진국과 학기가 일치되니 교류하거나 유학을 준비하기도 당연히 좋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바로 한국 사회가 나이로 서열을 가리는 특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선 어릴수록 ‘나이’에 대한 개념이 강하다. 1월 1일을 기준으로 그 전에 태어나면 형·누나, 이후엔 동생이 되는 게 당연시된다. ‘빠른년생’이 대표적이다. 빠른년생이 사회문제가 되자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바꿔 2009년부터 취학연령 기준일을 3월 1일에서 1월 1일로 바꿔 이런 혼란을 없앴다. 물론 우리의 독특한 나이 문화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문화를 간과한 채 9월 학기제를 밀어붙일 경우 학생들 간 큰 반목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9월 학기제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제도가 한 세대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당장 올해 고3은 입시지옥 생활을 6개월 더 해야 한다. 시쳇말로 군 생활을 반년 더 해야 하는 셈이다. 사회 진출 시기도 다른 학년보다 늦어진다. 또 9월 학기제가 당장 시행되면 최소 한두 해는 상당한 시행착오가 벌어지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런 불이익을 한 세대에만 전가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 2년 전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팀을 남북한 단일팀으로 구성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에 젊은 층은 극력 반발했다. 기회와 과정이 균등하지 않다는 점에서였다.

또 유학을 준비하기 좋으므로 9월 학기제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동의할 수 없다. 김 지사나 이 교육감처럼 지체 높으신 분들 주위엔 유학을 갔다 온 사람이 많겠지만, 일반 국민은 여전히 ‘유학’이 조금 생소하다. 소수의 편의를 위해 다수가 혼란을 감수해야 하는가. 9월 학기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풍토가 마련된 후에 실시해도 늦지 않다.

모규엽 사회부 차장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