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 불가피한 부실기업 살리느라 총알받이로 동원되는 세계 은행들

입력 2020-04-24 04:06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각국의 부양책이 갈수록 강화되면서 퇴출이 불가피한 부실기업을 껴안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 재정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한계에 부닥치자 시스템 리스크 예방이라는 명분으로 은행들이 총알받이로 동원되는 형국이다.

23일 국제금융센터,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전날 긴급이사회를 열어 은행의 투자부적격 기업 대출 시 담보 요구조건을 완화하기로 했다.

은행들이 지난 7일 기준으로 회사채 투자적격 등급 맨 하단인 BBB 이상이었던 기업들이 ‘타락한 천사(Fallen Angel)’, 즉 투기등급으로 바뀌더라도 대출 담보를 투자등급으로 인정토록 한 것이다. 새 규정은 내년 9월까지 적용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 2월 현재 전 세계적으로 ‘타락한 천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기업 회사채는 2750억 달러에 달한다.

ECB의 완화 정책은 지난 9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발표한 특정 시점의 투자등급 기업 회사채 인수방안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연준도 ECB의 은행 담보 규제 완화방안을 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FT는 전했다.

이에 따라 신용이 낮은 기업까지 챙겨야 하는 은행들로서는 자산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나마 미국과 유럽은 중앙은행이 그간 발권력을 동원해 회사채 인수에 나섰지만 한국의 경우 처음부터 은행들이 초저금리 대출, 만기 연장 및 상환 유예, 채권안정기금 마련 등에 동원됨에 따라 정책 당국이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뒤늦게 국책은행이 설립한 특수목적기구(SPV)에 대출하는 방식으로 저신용기업 회사채 인수를 검토하고 나섰지만 미국의 직접 매입과는 달라 이 역시 손실 회피에만 급급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의 경우 지난 17일 소상공인 특별지원프로그램 등에 돈을 대느라 4125억원 규모의 유상증자까지 나섰다. 이에 증권사들은 잇따라 기업은행 주가 목표를 하향 전망하고 나섰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 2일 국내은행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하면서 정부 주도의 재정·통화정책 시행 과정에서 은행의 자산건전성과 수익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더 큰 문제는 은행들이 장기 부실에 빠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7일 전 세계 주요은행 97곳 중 4분의 3의 신용을 부정적으로 전망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23일 보고서를 통해 “단기 상환유예 등은 신용손실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은행들의 대차대조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세계 경제가 회복되더라도 은행들의 수익 회복은 경제성장률 회복 속도만큼 가파르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이유로 코로나19에 따른 리스크 비용 증가, 장기 저금리 등을 들었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