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멋진 혹은 하찮은 신세계

입력 2020-04-23 04:04

적어도 첫날의 혼란은 없는 듯했다. 거실과 안방으로 구역을 나누고, 노트북을 1대씩 배정한 전략은 유효해 보였다. 오전 8시, 큰아들이 수업에 들어갔다. 1시간 시차를 두고 둘째가 수업에 돌입하자 집안 전체에 긴장감이 돌았다. 둘째는 쏟아지는 과제물을 처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오후에 아이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커피 한 잔과 책 읽기는 사치였고, 침대에 등을 대고 모자란 잠을 청하는 건 망발이었다. 보조교사이자 수업 장비 관리자이며 급식 영양사인 아내가 거실과 안방, 주방을 분주하게 오가는 동안 식탁 앞에 앉아 눈치만 봤다. “송신하지? 그런데, 어제는 난리도 아니었어. 오늘은 그야말로 평온하네.” 어른들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크게 불편을 느끼지도, 새삼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선천적 모바일세대’는 어느새 ‘코로나세대’로 변신하고 있었다.

보통 균열을 넘어 일상이 뿌리째 흔들리면 복원은 무의미해진다. 흑사병(페스트)은 14세기 유럽에 ‘전(前)’과 ‘후(後)’를 만든 길고 깊은 경계선이었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1억명가량 목숨을 앗아가면서 봉건제 쇠퇴를 불렀다. 인구 급감은 임금 급등을 불렀고 중소영주 파산, 농노의 자유민 전환, 도시화 가속, 인건비 상승에 따른 기술투자 확산, 해외 팽창 장려, 자영업·공업 발전, 교역 증가, 화폐경제 구축, 부르주아 등장이라는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도 못지않을 듯하다. 발생 5개월 만에 216개국에서 241만명이 확진됐고, 16만명이 사망했다(4월 21일 0시 집계). 암울하고 비참한 상황이 얼마나 더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하지만 짙은 트라우마는 세상과 사람을 바꿀 수밖에 없다.

이미 ‘포스트 코로나’의 첫머리가 보인다. 교육은 온라인과 홈스쿨링으로, 쇼핑이나 공연·스포츠경기 관람은 언택트(비대면 또는 비접촉)의 영역으로 진입할 것이다.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고, 강한 정부를 원하게 된다. 세계화가 뒷걸음질치면서 교역과 협력의 뼈대가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 재택근무 확산, 인공지능(AI)과 로봇 보급 확대로 일자리·노동의 기본 개념이 바뀔 수 있다. 원격진료, 모바일 헬스케어가 퍼지고 ‘바이오의 세기’가 찾아온다.

가혹한 양극화 세상이 도래할 수도 있다. 건강권 불평등, 디지털 불평등이 만연해질 것이다. 디지털 접근·장악력이 계급이 되고 건강을 좌우하는 세상이 올 수 있다. 바이러스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이 질병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될 수 있다. 일자리와 노동의 기본 정의를 새롭게 쓰면서 수많은 이들이 ‘의도하지 않은 백수’로 밀려나게 될지 모른다.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는 세상이 더 빠르게 다가올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다 부의 집중, 정보의 집중, 그리고 권력의 집중을 막기는커녕 속도를 붙일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미래는 불안일 수도, 희망일 수도 있다. 어떤 단추를 끼우느냐에 다가올 세상이 멋진 신세계일지, 하찮은 신세계일지가 달렸다. 코로나19 극복도 힘겨운 일이지만, 조만간 우리는 더 어렵고 위험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기본소득, 비대면 경제, 일자리 소멸 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우리 국민이 보여준 시민 정신과 희생이 긍정의 에너지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걸 어디에 쓸지는 정치의 몫이다. 다음 달 30일부터 4년간 ‘민의의 전당’을 책임질 300명의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된다. 그들은 시대가 무얼 원하는지 귀 기울이고 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걱정된다.

김찬희 디지털뉴스센터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