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비상금 1000만원을 원유 상장지수증권(ETN)에 넣었던 A씨(41)는 21일 장이 열리자 아연실색했다. 그가 투자한 ‘신한 레버리지 WTI원유 선물 ETN(H)’이 가파른 폭락세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이 종목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의 하루 변동률을 2배로 따라간다. 유가가 오르면 가격이 ‘더블’로 뛰지만, 반대 상황에선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다.
이 종목은 마이너스(-) 유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 38.85% 급락한 905원에 거래를 마쳤다. A씨는 “괴리율(지표가치와 시장가격의 차이) 경고가 나올 때 손절매를 했어야 하는데, 본전 생각에 매도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며 “이젠 손실이 너무 커 팔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국제 유가가 전대미문의 하락세를 연출하면서 ‘유가 반등’에 베팅한 원유 투자자들의 대규모 손실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수요가 급감한 원유 가격이 반등하기는커녕 마이너스까지 떨어지면서 손실률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날 미래에셋 레버리지 원유선물혼합 ETN(H)(-13.49%), 대신 WTI원유 선물 ETN(H)(-10.34%) 등도 일제히 하락했다. 사상 최초로 유가가 마이너스 값을 기록하자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키움증권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선 원유 선물옵션 거래가 중단되는 전산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원유 시장이 무너지면서 유가 관련 상장지수펀드(ETF)의 하락세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주(13~17일) 개인투자자들의 순매수 1위 종목인 ‘KODEX WTI원유선물(H)’ ETF는 이날 10.80% 급락한 5655원에 마감했다. 지난 14일 대비 30% 넘게 내린 상황이다. 개인투자자는 지난 20일에도 이 종목을 1522억원어치나 순매수했다.
원유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파생결합증권(DLS)도 상당수가 원금 손실(녹인·Knock-in) 구간에 진입한 상태다. 통상 DLS 상품은 발행 시점 대비 50% 하락하면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올해 초까지 50~60달러 선이던 WTI 선물 가격은 현재 6월물 기준으로 배럴당 20.33달러까지 떨어졌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1분기 원유 DLS 미상환 잔액은 1조2255억원에 달한다.
향후 유가가 반등해도 이러한 파생상품의 손실률이 줄어들 가능성은 높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국내에 상장된 원유 ETN과 ETF는 6월물로 롤오버(만기 교체)가 끝난 상태다. 일부 ETN의 괴리율이 50%를 넘는 상황에선 유가가 50% 올라도 투자 손실을 볼 수 있다. 이미 실제 유가보다 50% 높은 가격이 반영된 상태라서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레버리지 ETN 등의 경우 일일 변동폭을 기준으로 수익률을 산출하기 때문에 요즘처럼 하루 등락폭이 큰 상황에선 장기적으로 유가가 회복세를 보인다고 해도 수익률이 극히 낮거나 마이너스를 기록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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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