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이 위험자산이라면 채권은 안정적인 투자상품으로 통한다. 또 채권 금리는 경기 온도를 재는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세계은행이 2017년 6월 발행한 ‘전염병 채권(Pandemic Bond)’은 채권의 이익창출 역할을 넘어 사회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 출범했다. 한국의 산업은행은 발행 당시 ‘주간 KDB 리포트’에서 전염병 리스크를 자본시장에 전가한 첫 번째 사례로 평가하고, 우리나라 금융기관도 금융을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기여하는 통로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2014년 아프리카에서 에볼라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초기대응에 실패해 1만1300명의 사망자를 내고 100억 달러의 손실을 끼치자 전염병 예방과 확산 방지를 위해 채권을 발행키로 했다.
세계은행은 전염병긴급자금지원기구(PEF)를 설립하고 산하기관 국제개발협회(IDA)의 지원대상 77개 빈곤 국가에서 전염병 확산 조짐이 보일 경우 지원키로 했다. 총 4억2500만 달러를 시장에서 조달하고, 일부는 일본(5000만 달러) 독일(7800만 달러) 등으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이같이 출범한 전염병 채권이 드디어 3년여 만에 코로나19 유행으로 목적에 맞게 쓰이게 됐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7월 15일 채권 만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일 세계은행이 이 채권을 통해 코로나19 피해를 당한 국가에 1억3250만 달러를 지원키로 하고 지원 대상과 규모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지원 결정이 너무 늦어져 효과를 발휘할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세계은행에서 33년을 근무한 하버드 글로벌 헬스 연구소의 올가 요나스 선임연구원은 “채권기금이 전염병이 치솟을 때 신속하게 지불되지 않았다. 너무 늦었다”고 했다.
뒷북 비판이 나오는 것은 코로나19가 중국에서 발발한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난 데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은 증가세가 진정돼 봉쇄 완화가 검토되고 있으나 동남아시아 등 개도국에서는 전염병이 더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최초 발병국에서 2500명 이상 사망, 12주 연속 전염병 확진자 수 증가, 주변국에서 20명 이상 사망해야 한다’는 등 채권의 재난 구조 발동 요건이 까다로워 홍보용 술책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나마 이번에 기금 인출 결정이 내려진 것은 IDA 지원 국가에서 확진자 증가율이 플러스를 보였기 때문으로, 최근 뒤늦게 확진자가 급증한 인도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콩고에서 에볼라바이러스로 2200명이 사망해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나 이 채권의 자금 지급이 촉발되지 않은 전례가 있어 유명무실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대재해채권(Catastrophe Bond)의 특성상 채권 투자자에 지급하는 이자가 일반채권보다 높지만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손실을 감수해야 하므로 지급요건을 까다롭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염병 채권 가운데 2억2500만 달러 규모로 독감과 코로나바이이러스를 겨냥한 A형은 최초 투자금액의 16.7%를 손해볼 수 있다. 또 코로나와 에볼라바이러스 피해구제가 주목적인 B형은 9500만 달러 전액을 다 잃게 설계돼 있다.
하지만 베일리 기포드, 아문디 등 자산운용사들은 지난 2월까지 이미 이자로만 1억 달러를 챙긴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측은 이 같은 성격의 채권에 대해 자신들이 좌지우지하는 빈곤국 지원수단 중 하나의 툴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액수로도 세계은행이 이미 코로나19에 지원을 약속한 140억 달러의 100분 1도 안 된다.
런던정경대학의 클레어 웬험 조교수는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사람보다 민간투자자들에게 더 혜택을 주는 쪽으로 설계돼 있어 결함이 있다”며 “액수 자체가 푼돈”이라고 비꼬았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