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불길이 한 외국인 노동자의 ‘코리안 드림’을 집어삼켰다. 이역만리 화재 현장에서 10여명의 생명을 구한 이방인은 중증 화상만 얻은 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였다. 안타까운 사연에 이웃들은 치료비를 모아 건넸고, 그의 의상자(義傷者) 선정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지난달 23일 오후 11시22분쯤 카자흐스탄 출신 불법체류 노동자 알리(28 사진)씨는 자신이 사는 강원도 양양의 한 원룸 건물에 들어서다 매캐한 냄새를 맡고 화재를 직감했다. 곧바로 2, 3층으로 뛰어올라간 뒤 창문을 열어 연기를 빼냈다. 서툰 한국어로 “불이야”를 외치며 이웃들을 대피시켰다. 한 원룸 안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건물 밖 가스배관을 타고 들어갔지만 연기와 화마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현관문을 열자 소방관들이 진입해 인명구조를 시작했다.
알리씨는 이 과정에서 팔과 등, 목에 2~3도 화상을 입었다. 원룸 안에선 50대 여성 1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알리씨는 4명의 부상자 가운데 단 한 명의 중상자가 됐다. 그의 빠른 대처 덕분에 최소한의 인명피해만 발생한 셈이다.
알리씨는 다친 몸으로 곧바로 현장을 떠났다. 불법체류 사실이 알려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뒤늦게 주민들에게 등떠밀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심각한 화상 때문에 서울의 전문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선 치료를 위해 외국인등록증을 요구지만 그는 아무것도 건넬 수 없었다. 그는 2017년 12월 카자흐스탄에서 관광비자로 입국해 2년 동안 20만원짜리 월세방에 머물며 일용직으로 일해왔다. 한국에서 번 돈은 고향에 있는 부모와 아내, 두 아이를 위해 송금됐다.
현재 알리씨는 화상 치료로 한 달째 일하지 못해 생활비는커녕 원룸마저 불에 타 돌아갈 거처도 없다. 이런 상황에 놓인 알리씨의 부모형제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이웃들이었다. 불이 난 바로 옆건물에 사는 양양 손양초 장선옥(58 여) 교감은 이런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다. 손양초 교사와 이웃, 장 교감 지인들은 십시일반 700만원을 모아 치료비에 보탰다. 그가 화상 치료를 받는 베스티안 서울병원에서도 치료비를 지원했다.
장 교감은 알리씨를 돕기 위해 지난 16일 양양군에 그를 의상자 대상자로 추천했다. 의상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를 구하려다 다친 사람으로, 증서와 보상금 등 법률이 정한 예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장 교감은 그와 함께 출입국사무소에 불법체류 자진신고도 했다. 단속에 적발될 것을 두려워하는 알리씨의 의상자 추천을 위해서였다. 알리씨는 불법체류 자진신고를 했기에 신고 보름 후인 5월 1일 출국해야 한다. 양양군은 보건복지부에 의상자 신청을 할 계획이다.
“사람은 살려야 되잖아요.” 알리씨는 왜 불길에 뛰어들었느냐는 장 교감의 질문에 짧게 답했다.
양양=서승진 기자 sjse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