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우리의 시간을 그리는 한국 만화의 중심

입력 2020-04-25 04:05
국내 문화예술계에서 장르와 분야를 막론하고 작가들의 의견과 관점이 다양하게 얽혀 조율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원로의 역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한다. 한국 만화계에도 그렇게 모두를 모이게 하는 작가가 있다. 웃고 즐기며 다투고 논쟁하는 시간, 그 속에 늘 작가 이두호가 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두 공감하고, 그의 판단이 있기까지 얼마나 지난했는지 믿기에 생겨난 것이다.

만화가 이두호는 한국적인 회화와 진중한 역사의식을 담은 만화로 두터운 팬층을 거느리고 있다. 또한 그는 만화계의 논의를 모으는 선배이자 선생님으로서 자리매김했다. 필자 제공

이두호는 작품에서, 그리고 삶에서 한국 만화계의 명분과 정당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그래서 원로작가군을 비롯해 중견작가와 신인 작가를 아우르며 논의의 중심을 모으는 선배 역할과 공동의 목표에 대해 집중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선생님 역할을 맡게 됐다. 스스로는 그런 역할을 힘겨워하지만, 한국만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위한 논의에서 그는 항상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작업실로 출근하며 작화를 그린다.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모두에게 언제나 열려있다.

한국만화계의 기둥

1990년대 중반, 만화작가와 평론가들이 모여 한국만화의 미래에 관해 밤샘토론을 하던 때가 있었다. 남산자락에 있던 이두호의 작업실은 일본만화에 시장을 잠식당하는 한국만화와 열악한 정부의 지원정책에 대한 통탄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그는 젊은 작가와 평론가들의 끝이 안 보이던 논쟁의 시간 내내 함께 자리를 지키면서도 스포츠신문 일일 연재만화의 분량을 그려냈다. 오후 늦게 시작한 토론은 새벽을 지나 아침까지 결론 없이 이어졌지만, 그는 모두를 보내고 오전에 연재원고를 마감했다.

스포츠신문에 연재하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심의문제로 법적 소송까지 갔을 때 이두호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이었다. 평생 정부를 비판하거나 시위를 해본 적 없던 그가 한국만화의 미래를 위해 길거리에서 표현의 자유를 외쳤다. 또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가 미성년자보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기소돼 6년간 재판을 받을 때, 정작 당사자는 건강상의 이유로 나오지 못했던 재판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법정에 나와 혼자만의 싸움이 아님을 보여준 선배였다.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90년대 말 임용돼 만화가 육성에 필요한 학교 커리큘럼을 스스로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2001년 시작한 여름방학 만화캠프다. 모두 엄두도 못 내던 프로그램이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내가 학생들 데리고 산골 폐교라도 열흘 데리고 들어가 작품 하는 습관을 가르쳐야겠어. 만화가가 되려고 대학에 온 학생들이 너무 하는 일이 많네. 교양과목도 듣고, 학생회 소개팅 아르바이트 동아리도 다 해봐야 하잖아. 다른 과목도 많은데, 본인 작품 작화에만 매달려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없으니 그런 경험이 중요할 거야.”

모든 교수의 기우를 물리치고, 30여명의 만화 전공 학생들을 데리고 시작한 여름방학 만화캠프는 이런 제자 사랑과 애타는 열정에서 시작됐다. 30도가 넘는 더위와 방충망도 없는 폐교 교실, 상수도 시설이 미비해 주변 계곡에서 아침 세수를 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본인이 하루 20시간 이상 묵묵히 작화를 하니, 학생들도 생전 해보지 않았던 경험이지만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9박10일이 지나자 생애 처음으로 30페이지 남짓한 단편 만화를 어렵게 완성해본 예비작가들은 훌쩍 성장해 있었다. 이때 캠프를 경험했던 학생들은 이제 인기 웹툰 작가로 한국만화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

도장처럼 찍힌 ‘한국인의 얼굴’

1968년 박기정 선생의 문하에서 1년간 그림 수업을 받고, 이듬해 ‘투명인간’으로 정식 데뷔한 이두호는 이미 중학교 때 습작만화 ‘피리를 불어라’와 ‘길’ ‘등불’ ‘태양을 향하여’ 등의 창작만화를 제작해 출간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에는 소년 잡지에 만화를 연재했고, 이후 40년 동안 거의 매일 연재만화를 꾸준히 그려냈다. 그런 그의 만화에는 작가로서의 고집이 있었다. 배경과 의상, 이름과 대사 하나하나에 꼼꼼한 검증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는 여전히 닳아서 해진 ‘우리말 사전’이 있다. 또 조선시대 집의 형태와 당시 초가집의 구조, 산의 능선과 숲의 모양, 그리고 조선 초기·중기·후기를 구분하는 의상의 변천사, 대사에 등장하는 살아 숨 쉬는 우리말까지 양보와 타협이 없는 연출과 디테일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대중적 인기를 가진 여타 단편 작품과 비교해 오랫동안 두고 읽히는 밀리언셀러로 인정받는다.

“뚝배기 같고, 질그릇 같은 우리의 날 언어가 담기고, 등장인물 하나하나에는 어딘지 모르게 우리 주변에서 늘 봐왔던 ‘한국인의 얼굴’이 도장처럼 박힌다. 이두호의 창작작업은 그래서 ‘열 길 밑에 고인 차고 투명한 산골짜기 우물물을 조심조심 두레박으로 끌어올리는 노고에 감히 갈음할 수 있다” 만화평론가 손상익은 이미 90년대 초 그의 작품세계를 ‘바지저고리에 담긴 혼’이라는 찬사로 설명했다.

1970년대 ‘소년중앙’ 등 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던 당시에는 ‘폭풍의 그라운드’ ‘유령타자’ 등 스포츠물과 ‘뛰어라 까목이’ ‘무지개 행진곡’ 등의 생활드라마, ‘이층집 소녀’ ‘언니야’ 등의 순정 취향의 작품들을 두루 그렸다. 또한 영화와 TV 드라마를 각색한 ‘6백만불의 사나이’ ‘벤허’ ‘쿵푸’ ‘뿌리’ 등의 작품도 연재했고, 일본의 프로레슬링 만화 ‘타이거마스크’ 등의 번안작품도 그렸다. 젊은 시절 여러 장르와 형태의 만화를 창작하면서 그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고민했다. 결국 1980년대부터는 자신만의 작화 풍을 고집스럽게 만들었고, 대중성보다는 믿음직한 팬덤에 기반한 진중한 역사의식을 담은 이야기를 그리려 노력했다.

‘머털도사와 벌레대왕’. 필자 제공

그 시작은 ‘암행어사 허풍대’였고, 뒤이은 ‘바람소리’를 통해 자신만의 캐릭터 ‘장독대’를 등장시킨다. 고행석의 ‘구영탄’, 박봉성의 ‘최강타’, 허영만의 ‘이강토’, 이현세의 ‘오혜성’ 등이 작가와 평생 함께한 캐릭터라면 이두호의 장독대는 70~80년대를 가르는 그의 작가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작점이었다. 이후 ‘머털도사님’과 ‘머털도사와 또매형’을 통해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 머털도사를 등장시켰고, ‘째마리’를 통해선 한국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고증과 각주라는 형태의 설명을 보강해, 만화가 역사를 보여주는 장치일 수 있음을 대중적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80년대와 90년대 경계에서, 평생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두 장편이 시작되는데, 그 작품이 ‘객주’와 ‘임꺽정’이다.
‘객주’. 필자 제공

1988년 주간지에서 연재 시작한 ‘객주’와 1991년 스포츠조선에 연재한 ‘임꺽정’, 모두 소설원작을 만화로 각색한 작품이다. 당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와 거친 의상, 투박한 사투리까지. 작화 곳곳에 묻어있는 작가의 성실함과 역사의식은 기존 고우영과 방학기의 ‘임꺽정’과는 다른 캐릭터를 회화적 디테일로 완성해냈다.

‘임꺽정’ . 필자 제공

학교 동창생이었던 첫사랑과 결혼해 50년 넘게 사랑을 지키고 있는 이두호는 초등학교 때부터 본인이 해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해내야 하는 고집쟁이 소년이었다. 좋아하는 담임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자, 본인도 그 학교로 전학을 가겠다고 매일 한참을 더 걸어 그 학교 교문에서 무턱대고 기다리던 고집으로 전학을 가기도 했다. 홍익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 군 제대 후 만화작업에 매진하느라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화에는 늘 회화에 대한 고집스러운 열정이 숨겨져 있다. 그가 그리는 만화에는 데생의 완결성과 미학이 작가의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대학교 신입생들을 데리고 연중행사로 매년 방문하던 한국민속촌에서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 우리 모습을 확인시키는 작업으로 작화 수업을 시작했다. 우리의 모습을 알고 그려야 우리 작품이 된다는 그의 고집은 작가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 어디서 출발하는지 알려줬다. 후배들을 단련시키는 훈장 같은 그의 역할은 지금 한국만화 현장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