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 녹아든 서예… 온라인 개막부터 인기몰이

입력 2020-04-19 20:07 수정 2020-05-03 18:07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이래 처음 마련한 서예전 ‘미술관에 書(서)’가 코로나19 사태로 지난달 30일 온라인상으로 먼저 공개됐다. 사진은 전시 전경으로 정면에 보이는 것이 퍼포먼스를 연상시키는 권창륜의 파격적인 서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의 생존 작가 중 가장 작품 가격이 비싼 이우환 작가는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연작으로 유명하다. 어릴 때 서예를 배운 그는 “사랑방을 찾았던 동초 황현용 선생이 ‘점 찍어봐라. 선 그어봐라’며 한자 기초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게 평생 현대미술 하는 자산이 됐다”고 농을 하곤 했다. 전시장에 놓인 그의 작품 ‘동풍’에는 휘몰아치는 붓놀림에서 서예의 일필휘지 기운이 느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예전을 한다. 덕수궁관의 ‘미술관에 書(서)’가 그것이다. 1969년 개관 이래 첫 단독 서예전이다.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미술관이 잠정 휴관하면서 지난달 30일 유튜브를 통해 먼저 공개됐다. 19일 현재 5만4000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덕수궁관에서 직전에 개최한 ‘광장’전의 유튜브 조회수가 4개월간 2만회였던 점을 고려하면 인기몰이를 하는 셈이다.

서예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필수 교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1922년부터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당당히 서부(書部)가 포함됐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1981년 30회를 끝으로 민전으로 이양되기까지 서예는 동양화, 서양화, 조각과 함께 현대미술의 한 분야로 대접받았다. 1968년 17회 국전에서는 서예가 평보 서희환의 서예 작품이 당당히 대통령상을 받았다. 삼성 등 대기업 로고를 서예가들이 썼던 시절도 있었다.

이 전시는 ‘서예는 미술인가?’ ‘미술관에서 왜 서예 전시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일상화되며 손 글씨가 사라진 요즘에도 서예가 매력적인 장르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도 탐구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서예를 미술관 전시로 끌어오는 당위성을 ‘서화동원(書畵同源 서예와 그림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뜻)’의 문인화 전통에서 찾는다.

‘서예를 그리고, 그림을 쓰는 화가’들이 초대됐다. 한국화가로는 고암 이응노, 월전 장우성, 근원 김용준, 황창배, 박대성 등, 서양화가로는 김환기, 김창렬, 남관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해방의 기쁨에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을 형상화한 이응노의 ‘군상’에는 서예의 필획이, 김환기의 ‘항아리와 시’에는 그림 속에 재발(그린 동기 등을 쓴 글)을 쓰던 문인화의 전통이 스며 있다. 문자 추상, 서체 추상 등 서예를 추상화한 작품은 현대미를 물씬 풍긴다. 초대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가 서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진 작가를 중심으로 선정됐다.

서예적 붓놀림이 느껴지는 이우환의 ‘동풍 84011003’(왼쪽)과 회화적 조형미가 돋보이는 손재형의 ‘이충무공 시’.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본론은 당연히 서예 작품들이다. 소전 손재형,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강암 송성용, 석봉 고봉주, 소암 현중화, 원곡 김기승, 갈물 이철경 등 해방 이후 활동했던 1세대 서예 작가 12명이 초청됐다.

손재형의 서예작품에서는 회화의 조형미를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서법(書法)’, 일제강점기는 ‘서도(書道)’로 불렸던 ‘서’를 ‘서예’로 처음 명명한 그답다. 김응현은 어떤 조형미도 배격한 원칙적인 서예를 강조한다. 제주 출신 현중화의 행초(행서초서) 작품에서는 제주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던 한글 글씨인 궁체를 20세기 대중화시킨 주역인 여성 서예가 이철경의 글씨는 단아한 맛이 반하게 한다.

현대 서예가들의 파격적인 실험을 통해 현대미술로서의 확장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를테면 권창륜의 글씨는 마치 서예 퍼포먼스를 보는 듯하다. ‘해를 품은 달’ ‘송곳’ 등 드라마와 만화 등을 통해 친숙해진 제목 글씨도 만날 수 있다. 디자인을 입힘으로써 일상으로 파고드는 서예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온라인 관람은 먹의 향과 색이 주는 기운을 온전히 느끼기엔 한계가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 재개관이 되면 현장 관람하기를 권한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