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019년 활발한 정상외교를 펼쳤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 들어 대외 활동을 최소화하며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역대 최고 수준의 대북 제재가 여전히 북한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19 사태까지 터지면서 외치는 물론 내치에도 비상이 걸렸다. 연말에는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칠 미국 대선이 예정돼 있다. 여러 상황을 감안해 대응 방향을 찾아야 하는 김 위원장으로서는 고심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코로나19 총력전 나선 북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정면돌파’하고 ‘자력갱생’하겠다던 김 위원장의 연초 구상은 코로나19 사태에 발목이 잡혔다. 북·중 국경을 폐쇄하고 주된 외화 수입원인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포기한 탓에 경제 상황은 빠르게 나빠졌다. 고강도 대북 제재가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악재가 더해지면서 내치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북한의 열악한 의료 사정을 감안하면 코로나19 유입·확산 차단에 실패할 경우 경제는 물론 체제 존립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한이 코로나19 방역에 실패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코로나19 확진자가 단 1명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도 이달 초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본 모든 정보를 근거로 할 때 (북한에 확진자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노동당 창건 75주년이자 국가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전략의 마지막 해인 올해 주민들에게 과시할 만한 경제 성과가 필요한 김 위원장으로선 경제가 더 망가지지 않도록 코로나19 방역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 위원장은 바이러스 차단을 ‘국가 존망’이 걸린 문제로 규정하고 지난 1월부터 모든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코로나19 대응 방안을 최우선 안건으로 다뤘다. 코로나19를 체제에 대한 중장기적 위협으로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노동신문은 “(코로나19가) 우리의 투쟁과 전진에도 일정한 장애를 조성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코로나19 방역에 총력을 쏟는 기조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17일 “코로나 사태는 경제와 보건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라며 “자칫하면 경제·사회 발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김 위원장으로서는 코로나19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동안 관심을 쏟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미 대화 재개는 암중모색
김 위원장은 당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직접 대화해 제재 완화를 받아내고 북한 경제의 숨통을 틔우려 했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북·미 실무협상이 결렬된 후 대미 관계 교착 상태가 7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북한 경제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인 제재를 풀 열쇠를 쥐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전향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는 제재를 풀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북한은 더 이상 제재 완화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의 길을 가겠다”고 수차례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물밑으로는 북·미 대화 재개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함께 발신했다.
미국과 대화를 재개하려는 김 위원장의 의지는 최근 외교안보 라인 인선에서도 드러났다. 김 위원장은 외교 사령탑인 리선권 외무상을 당 정치국 후보위원과 국무위원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줬다. 대미 실무협상 책임자인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한때 실각설이 돌았으나 국무위원직을 유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두고 오는 11월 미국 대선 이후 북·미 대화가 재개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북한 외무성 내에 북·미 대화 전담 부서로 추정되는 ‘대미협상국’이 신설되기도 했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코로나19로 북한 경제의 내구성이 빠르게 소멸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속한 북·미 비핵화 협상 재개가 필요하다”며 “과거 북한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한 석탄과 철광석에 대한 수출 금지 해제만 향후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도 김 위원장으로서는 호재”라고 설명했다.
최대 변수는 미국 대선
김 위원장에게 최대 변수는 미국 대선이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세 차례 직접 만나고 친서도 교환할 만큼 친분을 쌓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도 임기가 4년 더 추가되면 북한과의 협상에 다시 응할 여지가 생긴다.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협상에서 양보안을 제시할 가능성도 있다. 홍민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맞게 되면 과거보다 과감하게 북·미 비핵화 협상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선에서 민주당의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꺾고 당선될 경우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바이든 전 부통령이 집권하면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핵화 협상 재개는커녕 지금까지 트럼프 행정부와 이뤄 왔던 진전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새 행정부가 출범하면 대북 정책을 포함한 외교정책 전반을 검토하고 새로운 전략을 마련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박원곤 교수는 “새 행정부가 들어설 경우 대북 정책과 협상팀을 꾸리는 데만 최소 6개월 이상 걸리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전 부통령은 지난해 김 위원장을 ‘독재자’로 지칭하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북한 당국도 바이든 전 부통령을 ‘미친 개’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최근 바이든 전 부통령은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처럼 김 위원장과 조건 없이 대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