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86세대가 주역인 세상

입력 2020-04-15 04:03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총선 결과가 나오기 전이지만 예측할 수 있는 결과가 있다. 당선자의 절대다수가 50대라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21대 총선에 나선 후보 1118명 가운데 48.2%인 539명이 50대다. 181명(16.2%)인 40대의 3배에 이르고 291명(26.0%)인 60대보다 1.9배가량 많다. 21대 총선은 역대 최악이지만 나름대로 시대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현재 50대인 86세대가 정치권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렇다. 축구 경기에 비유해보면 지금까지는 86세대 몇 명이 스타플레이어처럼 경기에 나섰다면 앞으로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에 골키퍼까지 모두 86세대가 뛰는 경기를 보게 될 것이다. 이번 총선을 전환점으로 진정한 86세대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지난해 ‘86세대는 이제 용퇴할 때가 됐다’는 말이 나왔을 때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당대표를 했나, 대통령이 됐나, 서울시장이 됐나. 이 나라 정치에서 책임지고 일해 볼 기회가 있었느냐. 주역이 돼 일해 본 경험이 없다.” 그의 말이 맞는다. 이제부터 86세대 출신 정당 대표와 대통령이 나오는 세상이 시작될 것이다.

86세대가 주역인 세상은 지루할 정도로 길 것으로 예상된다. 여러 조건이 그들에게 유리하다. 먼저 86세대는 노련하다. 당선자 상당수는 30대부터 국회의원 혹은 의원의 비서관·보좌관, 청와대 행정관 등으로 일하면서 현대정치사의 굴곡을 다 겪은 사람들이다.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법조계와 시민사회에서 영입된 86세대 당선자들도 그 노하우를 금방 배울 것이다. 여기에 평균 수명의 연장은 시대가 그들에게 준 선물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86세대는 신체적 건강을 더 잘 유지해 더 오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동년배 네트워크도 탄탄하다. 정치 분야뿐 아니라 기업, 학계, 시민사회에서도 86세대가 최고의 지위에 오르고 있다. 앞으로 최소 20년은 86세대의 세상이다. 이 세대에서 대통령 네다섯 명이 나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86세대가 주역인 세상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들이 대거 후보로 뛴 이번 총선을 보면 앞으로의 세상이 예측 가능하다. 이번 총선은 집권에 대한 탐욕 앞에서 원칙이나 명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소수 정당을 위한 것이라던 준연동형 비례제는 거대 양당의 장난감이 됐다. 비례 전용 정당의 탄생은 유권자들에게 혼란뿐 아니라 수치심을 안겨줬다.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끼게 됐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를 오로지 86세대의 책임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이들 대부분 말없이 정치적 탐욕의 행렬에 동참했다.

86세대가 주역인 세상에서 우려스러운 것은 그 세대 정치인들과 동년배 집단의 암묵적 혹은 직접적 공모를 통한 기득권 강화다. 86세대 정치인들과 공공기관, 대기업 등에서 정규직인 50대 사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은 정년 연장이다. 정년 연장이나 폐지는 고령화 시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당장 도입은 적절하지 않다. 직장에서 보상이 연공서열에 따라 이뤄지는 지금 도입하면 나이 많은 정규직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된다. 이는 세대 내, 세대 간 불평등을 더 심화시킬 것이다. 86세대 집단의 특징 중 하나는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익을 본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부동산 자산을 어떻게 자녀들에게 물려줄지가 이들의 최대 고민이 될 것이다. 86세대 정치인과 동년배 집단은 상속이나 증여의 부담을 줄여주는 정책 도입에 뜻을 모을 수 있다.

권기석 이슈&탐사2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