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람 좋은 인상에 모나지 않은 유형이다. 9년 전 기재부 대변인으로 있을 때 처음 만나본 느낌도 비슷했다. 호감형인 그는 말수가 적었다. 당시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는데 홍 부총리는 “아~ 예” 하는 식으로 불편한 상황을 잘 넘겼다. 위에 누가 와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예스맨’ 스타일이었다. 실제 코로나19 사태 전만 해도 존재감 있는 경제 책임자라기보다 대통령 경제 대변인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 그가 코로나 사태에서 보여주는 결기(?)는 당황스러울 정도다. 내가 아는 홍남기가 맞나 싶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추경,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할 것’ ‘돈 쓸 곳 없는 재난수당은 엇박자’ 등 요새 분위기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 당정청이 초기에 합의한 소득 하위 70% 대상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안에 대해 “기록으로라도 (반대)의견을 남기겠다”고도 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 대응 차원에서 현금을 살포하는 마당에 한가한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예산 당국 수장으로서 기축통화 보유국이 아닌 한국이 현금만 쏟아부을 경우 미래세대에게 부담이 된다는 점을 외면할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오히려 홍 부총리의 대응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는 정작 지난해까지 정부의 각종 복지 퍼주기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 결과 지난해 정부의 실질 살림살이인 관리재정수지는 사상 최악인 54조원 적자를 기록했다. 적자폭은 1년 만에 5배를 넘었다.
돈을 퍼부은 만큼의 실속도 없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대외 위기가 없었음에도 10년 만에 최저인 2%였다. 그것도 사실상 1%대 성장이지만 막판 온갖 재정을 투입한 끝에 억지로 만든 수치다. 1인당 국민소득은 4년 전 수준으로 퇴보했다. 반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기조는 지난해까지 자영업자의 첫 5분기 연속 소득 감소를 초래했다. 코로나가 닥치기 전에 이 정도니 올해 자영업자의 상황이 어떨지는 가늠조차 어렵다. 결국 정부는 평시에 퍼주다가 막상 올해 같은 일종의 전시 상황에서 실탄 마련에 애먹는 모습이다. 부총리의 소신 피력이 왠지 낯 간지러운 이유다. 그렇다고 지금 과거지사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하루 뒤면 총선이다. 확진자 수 감소, 코로나 대응에 대한 각국의 찬사로 분위기는 여당에 우호적이다. 결과가 좋으면(설사 좋지 않더라도) 현 청와대 속성상 이념성 경제정책을 계속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올 초 청와대 고위 인사의 사견이라던 ‘주택거래허가제’가 실현되지 말란 법이 없다.
이때 홍 부총리의 역할이 중요하다. 코로나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가운데 예상되는 청와대의 외골수 행보에 ‘노(NO)’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보다 반시장·반기업 족쇄 풀기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절실하다는 점을 청와대에 적극 알려야 한다. 코로나 대응에서 빛난 원격진료, 신속한 진단키트 개발도 예전 같으면 규제의 덫에 걸릴 것들이었다. SNS에서 소심하게 저항만 해선 안 된다.
1979년 12·12사태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측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사후 재가 요구에 10시간가량 버티다 13일 새벽 서명했다. 이때 결재란에 05:10을 적었다. 거부는 못해도 이 시간까지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보여준 제스처다. ‘소심한 저항’에 그친 최 대통령은 이후 신군부의 전횡을 방관했고 쓸쓸히 퇴장했다. 민주화는 10년 더 지체됐다.
시대 상황이 달라 직접 비교할 순 없다. 다만 정부의 책임있는 리더가 위기 때 직을 걸고라도 소신을 펴지 않으면 국가 미래가 어둡다는 점은 일맥상통한다. 총선 후 경제 컨트롤타워 홍 부총리의 행보를 많은 이가 주시하고 있다.
고세욱 경제부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