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정치인은 빠지세요”

입력 2020-04-13 04:03
기시미 이치로는 나이 예순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그가 좋아하는 소설가 김연수의 에세이를 일본어로 번역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계속 노력하려고 한다”고 했다. 기시미 이치로 제공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정치인이죠.”

자타공인 ‘용기 전도사’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64) 이야기다. 행복하려면 남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고 독려한 그의 책 ‘미움받을 용기’는 2014년 국내에 출간돼 지금까지 160만부가 팔릴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최근 신간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출간을 계기로 전화로 만난 그는 한국에 이틀 후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는 말에 미움받을 용기를 키워드 삼아 대화를 풀어나갔다.

“미움받을 용기는 미움받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인은 미움받을 용기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들어야 하고, 국민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코로나19 사태에서는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분명히 설명해야 합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지만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한 쪽은 국민입니다. 정치가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해야 하니까요.”

총선 후보자 중 마땅히 뽑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푸념에는 “무엇 때문에 정치를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가려내면 답이 나올 것”이라는 충고를 했다.

“아마 몇몇 후보는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고, 선거에 나와 인정받고 싶어하는 굴절된 인정욕구에 휩싸인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출마한 거겠죠.”

기시미 이치로는 그동안 저서를 통해 미움받을 용기 외에도 버텨내는 용기, 행복해질 용기, 늙어갈 용기 등에 대해 얘기해 왔다. 코로나19를 극복하는 데는 어떤 용기가 필요할까.

“진지하되 과도하게 심각해지지 않을 용기라고 할까요. 물론 ‘난 괜찮을 거야’ 식의 낙천주의는 금물입니다. 낙천주의와는 다른,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위기상황일수록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에 감사하고 기쁨을 느꼈으면 합니다.”

그가 용기를 강조하는 건 행복한 삶을 위해서다. 새 책은 19편의 한국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에게 삶의 고민을 상담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배우 김태리가 주연한 ‘리틀 포레스트’를 통해 ‘소확행’에 대해 말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안정을 찾지만 마음은 늘 서울을 향한다. 기시미 이치로는 소확행에 대해 “작은 행복과 대비되는 큰 행복이란 없다”면서 철학자 미키 기요시의 말을 인용했다. ‘성공과 행복, 실패와 불행을 동일시하게 된 이후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됐다.’

“제게 인생의 목표를 묻는다면 행복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미래’에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행복해야 한다는 거지요. 저는 영화 속 주인공에게 시골에서 사는 게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리허설이 아니라 행복을 누릴 본무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일류 대학, 대기업에 취직하는 성공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소중하다는 것을 코로나19 때문에 점점 더 실감하게 됩니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