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떠돌이 생활이 시작됐다. 신학교를 간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무작정 다니던 고등학교가 있는 군산으로 올라왔다. 여기저기 배회하며 전도하고 다니며 노숙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명석교회(현 군산 사랑의교회) 예배당에 숙소를 정했다. 피종진 목사님이 강사인 군산 개복교회 부흥회에 참석하고 그 교회 지하실에서 일주일을 지내기도 했다.
또 군산 중동성결교회 지하실에서 한 주간 잤다. 주로 낮에는 성경을 읽고 밤에는 기도를 했다. 물론 밥을 사 먹을 돈이 없으니 굶으면서 말이다. 생전 처음으로 일주일을 굶으니 걸어 다닐 힘도 없고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니 더 추웠다. 너무 추우면 침낭 속에 몸을 넣고 송장처럼 누워 기도했다. 차디찬 의자의 냉기가 허리에 닿아 얼마나 시렸는지 모른다. 예배당은 불기 하나 없어 가만히 누워 있어도 얼굴에는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오들오들 떨다가 잠이 들기도 했고 “주여”를 외치며 새벽기도 시간까지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런 형편을 알고 명석교회 집사님들이 식사 제공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집사님 댁에 가서 한두 끼씩 밥을 얻어먹는 것도 미안했다. 그래서 익산에 있는 친구 집에 가서 며칠을 보내기도 했으나 그것도 미안해 다시 교회로 왔다. 확실히 그때의 삶은 외로운 집시 생활이었다.
그래도 마음은 주 안에서 즐거웠다. 가슴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 생활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돌이 집시 생활을 하는 중에도 목표는 분명했다. 그것은 때가 되면 광주로 가는 것이다.
서울에 많고 많은 신학교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감동과 상황이 광주로 가게 한 것이다. 담임목사님은 지금도 생존해 계신데 당시 찾아가서 말씀을 드렸더니 감동대로 광주로 가라고 하셨다.
광주신학교에 갔을 때 입학시험을 봤다. 비록 지방신학교였지만 할 것은 다했다. 시험과목이 영어, 국어, 성경, 일반상식이었고 마지막 시간에 B4 사이즈의 시험지를 주면서 ‘소명의 동기’를 쓰라고 했다. 지금까지 사연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기도원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 아버지에게 매 맞는 것 등 다 쓸 수 있지만 그 순간 찬송가 구절이 떠올랐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 찬송 가사를 세 번이나 연속 썼다.
눈물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하얀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닌 누리끼리한 시험지에 얼마나 눈물을 적셨는지 모른다. 그때 기억으로 입학생이 70명 정도였는데 1등을 해서 4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버지께서 남원에서 군산까지 오셨다. 담임선생님도 만나보신 모양이었다. “소강석 학생은 교회에만 미쳐서 그렇지 나쁜 길로 가지도 않고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고 창의적인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친구들이 많이 따르는 성품을 갖고 있으니 목회의 길로 가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더 속상하고 억울해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이번에 대학을 안 갔으면 재수해서라도 일반대학을 가라. 그것도 아니면 공무원 시험이라도 쳐라. 공무원을 하면서 야간대를 다니든지 방통대를 다닐 수도 있지 않느냐. 이것이 애비의 마지막 소원이다.”
나는 그때 차디찬 운동장에서 많은 아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 아버지”만 하다가 목이 메어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언젠가 아버지께서 이 불효자를 이해해 주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두 다리를 붙잡고 펑펑 울어댔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돌아서서 걸어가셨다. 아버지께 달려가 끌어안았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언젠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눈물을 보이고 한숨만 쉬시며 그냥 걸어가셨다. 지금도 2월이 되면 그렇게 쓸쓸하게 걸어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얼마 후 광주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거기서 배 고프고 고독하며 혹독한 시련의 광야 길을 걸어야 했다. 그렇지만 목회자가 가져야 할 기본 자질과 소양을 훈련받게 됐고 하루하루가 꿈 없이 잠들고 꿈 없이 깨는 날이 없을 정도로 깊고 푸른 꿈의 나날들을 보냈다.
광주신학교는 서울의 신학교에 비해 낙후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오늘의 나를 잉태하고 출산시키는 요람이 됐다. 그렇게 엄하셨던 아버지는 훗날 내가 목사가 된 후 나의 전도로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그리고 교회를 성실히 다니며 아들이 교회 목사가 됐다며 자랑하시는 날도 있었다.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교회에서 십일조의 선악과 따먹지 말라
언젠가 ‘십일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십일조와 선악과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분의 글을 보니까 구원사적 구속사 신학도 어느 정도 섭렵한 것 같고 신구약을 연결하는 신학적인 연결고리 지식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분은 십일조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
잠언에 보면 지혜를 생명나무에 비유했다.(잠 3:18) 매 순간순간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잠언서는 지혜를 생명나무라고 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한다.(잠 9:10) 즉 생명나무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지혜로 적용해 교훈한 것이다.
설교는 본문에 기반을 둬야 하는데 원근통시법적 구조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총체성을 드러내고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의 교훈을 십일조, 주일성수, 주의 종과의 관계, 부부의 관계로 확장해 적용한 것이다.
훗날 생명나무 심포지엄을 했을 때 세계적인 구약학자인 벤게메렌 교수가 오셨다.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건 성경을 자기의 선택적 지식으로만 갖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잠언서에 생명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설교란 본문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님 말씀의 총체성을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선악과의 관계를 잘 연결한 설교였습니다.”
그렇다. 십일조, 주일성수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과 부부생활에도 선악과적 제한 요소가 있다. 하나님이 하라는 만큼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십일조 같은 경우도 처음에는 십일조를 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순종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선악의 지식이 들어와 자기가 판단의 주체가 되다 보면 십일조를 자기 멋대로 하게 된다. 십일조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느니, 또 하나님은 마음을 원하시지 물질을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느니, 자기 멋대로 판단해 버린다. 그래서 십일조의 선악과를 따먹어버린다.
또 주일에 대한 부분도 처음에는 주일성수를 잘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낙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선악의 바람이 들어와서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된다.
“꼭 주일만 주일이냐, 모든 일주일이 주의 날인데. 그러니까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예배드리고 주일날 놀러 다닐 수 있는 거지. 또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되느냐. 바닷가에서 골프장에서 예배드리고 즐기면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다가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주일성수의 선악과를 따먹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나무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때는 십일조나 주일성수를 율법이나 형식으로 지키지 않는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며 생명이 풍성하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2조, 십의 3조도 드릴 수 있고 더 헌신할 수 있다. 주일예배도 한 번 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온종일 말씀을 묵상하든지 교회에서 헌신하든지 더 적극적으로 주일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단 뿔에 매는 훈련을 한다.
또 교회 생활하면서 담임목사와의 관계도 그냥 적당한 거리를 두는 관계가 아니라 더 가까이하고 양과 목자의 관계에서 더 공감하고 친숙한 관계를 형성한다. 부부관계도 선악과적인 금도의 경계선만 안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으로 더 사랑하고 위해주고 희생해주고 섬기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교회에서 십일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주일성수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주의 종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부부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모든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에서도 선악과가 아닌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살아가라고 가르쳤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계속 훈련이 되니 교회가 어느새 생명나무가 우거지고 열매가 주렁주렁 맺게 된 것이다.
소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