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코로나19는 사회통합의 시험대

입력 2020-04-11 04:0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지구촌으로 확산되면서 세계 각국의 숨은 실력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보다 한참 앞선 선진국인 줄 알았던 서유럽과 북미 국가들이 코로나19 대응에 쩔쩔매고, 복지선진국으로 꼽혔던 북유럽 국가들마저 코로나19 앞에 흔들린다. 부자나라들의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준 나라는 많지 않다. 외신들은 그중에서도 한국이 코로나19 대응에서 독보적으로 앞서 있다고 평가한다.

이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한국이 코로나19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배경에는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높은 수준의 사회통합 및 질서의식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3일자 ‘한국은 어떻게 코로나19 곡선을 평탄하게 만들었나’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양극화와 포퓰리즘에 시달리는 서구 국가와 달리 한국에선 사회적 신뢰도가 높고 공공의 의지와 정치적 의지가 강하다고 평가했다.

촛불과 태극기,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분열돼 갈등하는 모습이 눈에 익은 우리가 보기엔 뜬금없어 보인다. 하지만 외신들은 그마저도 부럽게 봤다. 수만에서 수십만명까지 모이는 군중집회가 평화롭게 끝난다는 건 서구사회에서 드문 일이다. 2018년 말 시작된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 201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반대 시위는 모두 약탈과 방화로 이어졌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폭동으로 이어지곤 하는 미국에선 약탈을 막으려고 중화기를 준비해놓은 상인들이 많다. 한국에선 약간의 무질서와 민폐가 있긴 하지만, 촛불집회든 태극기집회든 대체로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한국사회의 높은 통합 수준은 코로나19 대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응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정부에 불만이 있어도 폭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다소 불편할 수 있는 방역 조치에도 대부분 협조적이었다. 사회 구성원과 정부·지자체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 사재기도 없었다. 오히려 더 급한 이들을 위해 마스크 구매를 포기한 이들도 있었다.

정부와 지자체도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려 애썼고 기존 정책과 방침이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언론은 때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부의 잘못을 비판했지만, 순작용도 많았다. 마스크 대란을 질타하자 새로운 마스크 수급 대책이 나왔고, 중증질환자 병상 부족 등 의료시스템 붕괴를 비판하자 생활치료센터라는 대안이 마련됐다. 민주주의와 사회통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언론의 자유는 과하다 싶을 정도도 보장돼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언론들은 정부 비판에 몸을 사리고 정부는 헛발질을 거듭하다 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코로나19 대응에서 드러난 한국의 성취에 대해선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방역 일선에서 뛰는 공직자와 전문가,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정부와 지자체에 대한 칭찬과 격려에도 인색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다. 극심한 사회 갈등과 분열을 겪는 일부 선진국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사회통합을 유지·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그런데 가치관과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감을 갖고 공격하는 극단주의자들이 늘고 있다. ‘대깨문’이나 ‘토착왜구’ 같은 선동적 표현은 상대방을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절멸의 대상으로 본다. 4·15 총선에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증오와 적대감을 부추기는 이들이 국민의 선택을 받게 해선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분열이냐 통합이냐’다.

코로나19 한가운데서 대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한국교회에도 사회통합의 구심점 역할이 요구된다. 공동체의식을 고양하면서 빈부, 좌우, 남녀, 지역, 세대, 인종 간 갈등이 극단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화해와 중재, 포용의 역할을 하면 좋겠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