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에는 절체절명의 대한민국을 구한 수많은 전투가 있었다. 그중 개전 초기에 해상과 육상에서 최초로 적을 물리친 대한해협 해전과 춘천 전투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첫 번째 전투는 대한해협 해전이었다. 6·25전쟁 발발 후 북한군은 가장 먼저 동해안의 정동진과 옥계 지역에 해상을 통해 상륙했다. 이에 적 상륙부대를 격멸하기 위해 진해항에 있던 당시 국내 유일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에 긴급출동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의 무장특수부대 600여명을 태운 1000t급 무장 수송선이 38선을 넘어 부산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부산에 침투해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군은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 적함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옥계 지역으로 출동 명령을 받고 북상하던 백두산함은 부산 앞바다에서 6월 25일 저녁 8시 12분 우연히 괴선박을 발견했다. 자정이 되도록 교신을 시도했으나 상대방에서 아무런 답변이 없자 적함으로 확신한 최용남 중령은 승조원 60여명의 장병을 향해 “김일성 공산당은 우리의 적이다.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라는 말을 하고 6월 26일 새벽 12시 30분 적함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시각부터 적함과의 치열한 교전이 오갔다. 새벽 1시 10분이 됐을 때 적함이 침몰하기 시작하더니 새벽 1시 38분 북한군 600여명을 태운 무장 수송선은 부산 앞바다에 완전히 침몰했다. 이것이 바로 6·25전쟁 최초의 승전인 대한해협 해전이다.
이 빛나는 승전의 과정에는 전병익 중사와 김창학 하사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전병익 중사는 적탄에 의한 흉부 관통으로, 김창학 하사는 파편상으로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전 중사와 김 하사는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적함은 어찌 됐습니까?”라고 외쳤다.
그리고 적함이 침몰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둘 다 ‘대한민국… ’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백두산함이 적함을 침몰시키지 못했다면 부산항은 적의 수중에 점령당해 유엔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공산화됐을 것이다.
두 번째는 춘천 전투다. 6·25전쟁이 발발할 때 당초 북한군 계획은 북한군 1군단을 개성 문산 동두천 포천 방면에 투입해 38선을 돌파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북한 2군단을 화천 춘천 인제 홍천에 투입해 춘천과 홍천을 각각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과 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들어가, 후퇴하는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북한군 2군단 중 춘천 방면에 대한 공격은 제2사단이 맡고 있었다. 이청송 소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실시한 북한군 자체 검열에서 최우수 부대로 선정될 정도로 전투력을 인정받고 있는 사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6·25 남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춘천 점령의 임무가 주어졌다.
북한군 제2사단의 작전 계획은 38선을 뚫고 모진교를 지나 하루 만에 옥산포 소양강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 이남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남침 계획대로 북한군은 전쟁 발발 30분 만에 모진교를 점령하고 옥산포를 지나게 됐다.
그런데 옥산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옥산포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 옥산포 전투가 6·25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꿨다. 당시 국군 6사단 7연대는 옥산포를 지나고 있는 북한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거침없이 내려오던 북한군은 뜻밖의 기습으로 큰 타격을 입고 하루 동안 옥산포를 넘지 못하게 되면서 하루 만에 춘천을 점령하려는 작전 계획이 실패하게 됐다. 옥산포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6사단 7연대장이었던 임부택 중령이 전쟁을 예측하고 미리 한 달 전 우두산 8부 능선에 참호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성 소령이 지휘하는 6사단 포병대대는 적 1개 연대를 괴멸시키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비록 춘천이 적에게 점령되기는 했으나 국군 6사단이 적의 침략을 3일 동안 막아주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수도권 외곽 포위 작전’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고 남한을 조기에 점령하려 했던 북한군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이처럼 대한해협 전투와 춘천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또 자유 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운 수많은 무명용사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김재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