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쇼크’가 기업의 자금난으로 빠르게 옮겨붙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실물경제와 금융 부문에까지 타격을 가하면서 대출로 버텨보려고 은행에 손을 벌리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금 부자’로 꼽히는 대기업들의 대출 급증세가 심상치 않다. 영업과 재무 악화를 우려하는 대기업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유동성을 비축하고 있는 건데, 그만큼 경기 불확실성이 높다는 방증이다.
8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3월 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으로 은행권의 기업대출 잔액은 901조3000억원이었다. 전달보다 18조7000억원 늘었다.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09년 6월 이후 최대 규모다.
눈길을 끄는 건 대기업 대출이다. 전달보다 10조7000억원이 늘면서 역대 최대 폭을 찍었다. 2월에는 오히려 2000억원을 은행에 상환했는데, 한 달 만에 대출 증가 폭이 수직 상승한 것이다.
한은 금융시장국 관계자는 “코로나19에 따른 여파로 기업들의 자금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자영업자) 대출 모두 역대 최대폭으로 늘었다”면서 “대기업의 경우 신용경색에 대비해 미리 현금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짙어 보인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대기업 대출의 급증 배경으로 채권시장의 경색을 꼽고 있다. 대기업들은 통상 은행보다는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투자가 위축되면서 직접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은행 대출로 급히 발길을 틀었다는 것이다. 실제, 회사채 순발행액은 지난 2월 3조3000억원에서 지난달 마이너스(-) 5000억원을 기록했다. 이 금액만큼 은행에 상환했다는 것이다. CP의 경우, 같은 기간 2조원에서 -1조5000억원으로 감소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마이너스 통장’ 같은 은행 한도성 대출을 통해 유동성 확보에 나선 것”이라며 “점점 다가오는 2분기 ‘충격’을 감내하기 위한 방파제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국내 500대 기업의 회사채 규모는 37조4600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40% 수준인 14조7545억원은 2분기에 상환해야 한다. 이 기간은 이번 달을 중심으로 은행들의 기업 신용조정이 이뤄지는 시기와도 겹친다.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이 큰 기업일수록 ‘피가 마르는’ 시즌이 될 수 있다. 자동차와 항공, 해운 업계 등은 코로나19 확산 여부와 피해 수준에 따라 신용등급의 하락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 상황으로만 보더라도 실제 신용등급 하락이 예상되는 기업이 적지 않다”면서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회사채 금리가 높아지기 때문에 대기업들로선 만일에 대비한 ‘현금 확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