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여당 의원 4명이 갑자기 당적을 옮겼다. DJP연합을 통해 정권을 잡은 김대중정부의 여당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이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 그해 16대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 20명에 3명이 모자랐던 자민련에 여당이 의원들을 보내 교섭단체를 만들어준 것이다. 의원 꿔주기의 최초 양태다. 자민련에 입당한 민주당 의원은 “한 마리 연어가 돼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당시 여당의 의원 꿔주기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개정된 공직선거법은 여야 간에 숱한 고소 고발을 낳고 또 낳았다. 의원들이 재판에 넘겨졌고 일부는 아직도 수사 중이다. 이런 난리통에도 이른바 4+1협의체가 밀어붙였던 법 개정의 명분은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 확대, 의회의 다양성 제고였다.
그렇게 거창한 명분과 당위성을 안고 출발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파생 효과는 21대 총선의 처음과 끝을 장식할 기세다. 창당부터 그랬고,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더 난리다. 미래통합당은 비례정당에 의원 렌트를 시작했다. 결국 20명을 채워 교섭단체까지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통합당과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 사이에선 비례대표 후보 순번을 놓고 여지없이 고성과 맹비난이 오갔다. “공천 쿠데타” “배신” “가소로운 자들” 등 한 집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험악한 말들이 오갔다. 이것이 그나마 비례정당의 정체성과 대표성을 둘러싼 싸움이라면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겠으나 내 사람 심기가 배경이라면 묵과하기 어렵다.
더불어민주당과 여기에서 파생된 두 비례정당은 더 막장이다. 민주당은 애초 통합당 의원들의 한국당 입당을 ‘위장전입’ ‘쓰레기정당’이라고 비난하다 나중엔 우리도 질 수 없다며 의원 꿔주기에 나섰다. 그럼에도 더불어시민당은 연합정당이어서 다르다고 한다. 내로남불은 여전하다.
소수정당 진출 확대, 다양성 제고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명분은 사라졌다. 이번 총선에선 소수정당이 오히려 설 자리를 더 잃게 되는 건 명백해 보인다. 미래한국당과 열린민주당은 총선 뒤 친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민주당은 총선 뒤 시민당과 당대당 통합할 태세다. 거대 양당제의 폐해를 줄이자는 것에서 출발한 이 제도가 결국 양당의 의석 수를 더 불려주는 식으로 귀결될 듯하다.
이 와중에 시민당은 공약을 두 차례나 철회하는 해프닝도 빚었다. 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이들은 열린민주당에서 버젓이 비례 순번 상위권을 차지했다. 전 청와대 대변인은 불출마를 번복하고 선거에 뛰어들었다. 조국 사태로 기소되자 “검찰의 쿠데타”라고 했던 전직 청와대 비서관은 비례 순번 2번을 받고 연일 ‘검찰 때리기’ 선봉에 나서고 있다. 조국 전 장관은 띄우고 윤석열 검찰총장을 때리는 행태의 배경은 자명하다. 다시 ‘조국 수호’ 프레임을 시도하는 것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취지는 완벽하게 실종됐다. 사라진 자리는 거대 양당의 파울 플레이가 고스란히 채웠다. 비례정당을 둘러싸고 ‘여당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다’ ‘저쪽이 먼저 반칙했다’ 등등 양당이 매일 내놓는 변명은 군색하기 그지없다. 선거를 코앞에 둔 현재도 이런 상황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구구절절한 변명만 늘어놓을 생각이었다면 선거법은 도대체 무얼 위해 바꿨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엿새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 결과를 놓고 여야에선 많은 책임론이 오가겠지만 반성은 없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21대 국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거법을 다시 개정하는 것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다시 확 뜯어고쳐 꼼수와 반칙이 자리잡을 틈새를 주지 말아야 한다. 이런 선거는 한번이면 족하다.
남혁상 정치부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