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10억원 있으면 뭐해요. 은행에 넣어도 월 100만원 받기 힘는데.”
경기도 광명에 사는 정모(56)씨는 요즘 ‘돈 굴리기’가 가장 큰 고민이다. 학원을 운영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정리한 뒤 손에 쥔 5억원의 여윳돈을 어떻게 굴릴지 머리를 싸매고 있다. “주변에선 주식을 사라는데 너무 위험해 보이고, 월세 나오는 부동산을 살까 싶은데 코로나19 때문에 경기가 더 얼어붙을 거 같아서… 어디에 넣어둬야 할지 모르겠어요.”
코로나19가 소환한 ‘제로(0) 금리’ 시대에 투자자들이 고민에 빠지고 있다. 세계 각국은 코로나19 여파로 공황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준금리를 대폭 낮추는 ‘빅컷(Big Cut)’을 단행했다. 미국이 지난달 기준금리를 0.00~0.20%로 낮췄고, 한국은행도 0.75%로 낮추며 인하 대열에 동참했다. 1% 안팎인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다. 2015년 이후 ‘금리 정상화’를 시도했던 글로벌 경제는 5년 만에 다시 제로금리에 돌입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글로벌 저금리 흐름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본다.
‘제로금리’란 무엇인가
금리는 ‘돈의 값’을 나타낸다. 돈의 가치가 낮아지면 월급을 모아 은행 이자로 불려나가는 통상적 재테크가 어려워진다. 시장금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투자자들이 고수익을 추구하면서 사모펀드나 고위험 파생상품, 부동산 금융 등에 돈이 쏠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지난 10년간 기준금리 움직임과 극명하게 대비된 건 미국 증시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1300선이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는 그해 연말 700선 밑으로 주저앉았다. 연 5.00% 수준이던 기준금리는 연 0.00~0.20%까지 급락했다. 이 같은 흐름은 2015년 11월까지 이어졌고, S&P500은 전 고점을 넘어 2000선까지 치솟았다. 이후 미국이 서서히 금리를 올리는 과정에서도 꾸준히 상승해 지난 2월 3300선까지 올라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그렇다면 제로금리는 모두에게 축복일까.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초저금리 과정에서 나타난 저성장·저물가·저금리라는 ‘뉴노멀(New Normal)’ 현상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임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4일 발표한 ‘제로금리 시대의 잠재적 리스크와 대응’ 보고서에서 “가계와 기업 부채가 과도하게 확대될 수 있고, 노후 대비를 위한 가계의 자산 형성에 어려움이 가중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제로금리 시대의 최대 위협 요소는 바로 ‘빚’이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레버리지(부채) 수요는 높아지고, 근로소득으로 재산을 축적하기 어렵게 된 개인들이 주식 등 위험자산 투자에 나서면서 자산시장의 버블(거품)이 확대되는 것이다. 실제로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부동산 금융, 대출담보부증권(CLO), 파생상품 등 리스크가 큰 투자를 대폭 늘려 왔다. 국내에서도 은행 이자보다 나은 수익률을 쫓는 흐름이 거세지면서 해외 금리 연계형 파생결합펀드(DLF), 라임자산운용 펀드 환매중단 사태 등 다양한 금융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송민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금융회사들이 고위험·고수익 상품을 취급하는 과정에서 소비자보호 및 금융분쟁 문제가 더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제로금리 시대의 함정
제로금리는 신흥국에 ‘자본 유출’이란 재앙으로 다가온다. 선진국 대비 높은 금리로 유입됐던 외국 자본이 금리 인하로 빠져나가면서 ‘외화 유동성 축소→자금시장 경색’이란 악순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 확산으로 실물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최근 신흥국의 ‘부채 공포’는 극에 달한 상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신흥국의 수출 수익, 관광 수입 등이 붕괴될 경우 많은 나라의 재정이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빠질 우려가 높다”고 보도했다.
한국도 부채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국내 가계 및 기업부채 총액은 3717조5770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2배에 달한다.
국내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3.9%로 BIS 조사대상 43개국 가운데 7위였다. 전년 대비 가계부채 비율 상승폭(2.7% 포인트)도 홍콩과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전문가들은 다시 찾아온 제로금리 시대의 경제 충격을 우려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난달 31일 ‘저금리 시대의 리스크와 대응과제’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미국이 최근 기준금리를 내릴 때 덴마크 중앙은행은 외화 유출을 막겠다며 되레 금리를 올렸다”며 “금리가 내려가면 주가가 오르지 않느냐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외환 등 금융시장의 불안정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용명 한화자산운용 부문장은 “우리보다 먼저 제로금리 시대에 진입한 일본의 사례에 비춰 고령화사회와 잠재성장률 하락, 산업경쟁력 약화 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과제”라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