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희귀약품 ‘하늘의 별 따기’인데…올해 공급 예산 ‘0원’

입력 2020-04-06 04:0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희귀약품 공급난은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올해 정부가 희귀의약품을 공급하는 데 별도로 배정한 예산은 0원으로 한 푼도 없다. 차선책으로 희귀약품 공급을 전담하는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 예산이라도 늘려야 함에도 이조차 배정에 인색하다 보니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급작스러운 수급난에 발빠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센터의 예산 증액 요구에 예산 당국에선 주무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 예산을 우선 사용해야 한다고 책임을 미루고 있다. 식약처는 희귀약품 공급 예산을 별도로 편성할 계획조차 뚜렷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정부 부처가 예산을 두고 탁상행정만 벌이는 동안 ‘약품 공급 사각지대’에 놓인 희귀병 환자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험난한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올해 센터 예산 요구액의 21%만 인정

5일 기획재정부와 식약처에 따르면 국내에서 희귀약품 공급을 전담하는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의 올해 예산은 29억8900만원이다. 당초 센터는 올해 필요예산으로 총 140억300만원을 산정해 요구했다. 예산 당국인 기획재정부는 요구액의 17% 수준인 약 23억9400만원을 인정해 예산안을 편성했다. 이후 국회 논의 과정에서 겨우 5억원이 증액되는 데 그쳤다. 전체 요구액의 약 21.3%만 받게 된 것이다.

그나마 센터의 예산 대부분은 인건비와 운영비로 사용되고 있다. 희귀의약품 공급을 위한 예산은 별도로 편성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센터는 환자들로부터 받은 약값 수익으로 희귀약품을 산 뒤 환자에게 공급하는 ‘밑돌로 윗돌 괴기’ 식의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센터 관계자는 “공급난을 대비해서 미리 충분한 양의 약을 사서 국내에 비축해놓으면 환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약을 따로 살 수 있는 예산이 없어 보통 1~2개월치 약품만 미리 구매한 뒤 환자들에게 공급한다. 판매 수익이 희귀의약품 구입예산인 셈이다”고 설명했다.

기재부 “식약처 예산으로 해결 가능”

반면 기재부는 희귀의약품 공급난의 원인이 ‘예산 부족’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예산이 부족할 경우 센터가 상위 부처인 식약처에 긴급 목적의 예산 편성을 요청하는 게 우선이라는 설명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코로나19 등으로 약품 수급이 어려울 경우 식약처가 예산을 전용해 센터에 내려보내는 식으로 기존 예산을 활용하는 게 우선이다. 약품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예산 당국이 아닌 주무부처의 책임이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식약처 예산이 현재로선 부족하다고 볼 수 없어 추가경정예산에 센터만을 위한 별도의 예산을 편성할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올해 식약처의 예산은 5592억원이다.

아직 식약처는 코로나19로 인한 희귀약품 공급난 현황을 파악하고 향후 수요를 감안해 추가로 예산을 배정하거나, 예비비 편성 요구를 따로 한다는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그나마 식약처가 지난 2월 기재부에 예비비를 편성해 달라고 요구했던 분야는 ‘의료용 대마 구매비용’이다. 이마저도 예산 당국의 벽에 막혔다. 식약처 관계자는 “의료용 대마 수급이 원활하도록 구입비를 기재부에 요청했지만 최종 편성에는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예산 부족→사업 중단’ 악순환 고리

센터 예산 부족은 환자들을 위한 사업 중단 사태까지 일으키고 있다. 애초 센터는 희귀·필수의약품이 원활히 공급될 수 있도록 올해 지역거점센터 설치 등의 사업을 추진하려 했지만, 현재 모두 손을 뗐다. 특히 지난해 3월부터 시행해왔던 위탁배송 시범사업은 지난 2월 5일부로 중단했다. 예산 부족으로 센터가 기존 위탁배송 업체와의 계약을 연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센터 관계자는 “이로 인해 환자들이 불편하더라도 센터를 직접 방문해 약품을 수령해야 한다. 서울 외 지역에 거주하는 희귀병 환자들은 방문수령을 하지 못해 필요한 약품을 적절한 시기에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산 부족 문제는 지난해 식약처에 대한 국정감사의 주요 이슈였다. 지난해 센터는 운영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관행적으로 약가 차액을 센터의 운영비로 활용했었다는 점을 지적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은 “센터 운영비 국고 보조율이 평균 37% 수준에 그치며 불거진 일”이라며 “센터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이의경 식약처장은 “센터가 정상적·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예산확보에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희귀병 환자 위한 특별기금 운영 필요”

일부에선 정부가 희귀의약품 공급난을 대비해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을 편성하는 식의 조처라도 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희귀의약품은 수급상황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센터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인해 일부 약품 가격이 3배까지 뛰었다. 희귀약품은 공급량도 적어 시장 상황에 따른 가격 변동폭이 크다”고 설명했다. 한 해 예산이 기관을 중심으로 고정적으로 짜인 상황에선 약품 가격이 오르면 구매량도 줄어든다. 자연스럽게 치료를 원하는 환자들의 수요를 맞추기 어려워진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국정감사 이슈 분석 자료를 통해 “희귀의약품은 다른 의약품에 비해 공급 불안정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재정지원이 가능하도록 기금운영 제도를 고려해야 한다. 희귀의약품 수요·공급 현황을 실시간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체계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전성필 기자, 최지웅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