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재정팽창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주요 국가들이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고 돈을 퍼부으면서 세금을 걷은 만큼 쓴다는 ‘균형 예산’이 깨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큰 경제 규모와 돈을 찍어 재정적자를 메꾸는 중앙은행의 도움이 있다. 한국은 이들 국가보다 경제 규모가 작고 기축통화국이 아닌 만큼 무제한 현금 살포가 쉽지 않지만 우리도 중앙은행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요구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
각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통화정책’으로 넘었다면 2020년 코로나19는 ‘재정정책’으로 돌파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주요 20개국(G20)의 경기 부양책 규모는 무려 3조573억 달러(약 4000조원)에 달한다. 이미 국가채무 비율이 100%가 넘는 미국(106.9%) 영국(111.8%) 일본(224.1%) 등은 국내총생산(GDP)의 10%가 넘는 추가 지출을 계획하고 있다.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던 유럽연합(EU)조차 재정 준칙을 던져버렸다. 지난달 EU 재무장관들은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각각 GDP의 3% 이하, 60% 이하로 유지하는 원칙을 일시 중단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균형 예산은 도전을 받아왔다. 미국과 일본의 재정정책 운용 탓이다. 개인도 부자면 많은 대출을 감당할 수 있듯 한국보다 GDP가 큰 미국(약 14배)과 일본(약 4배)은 경제 규모를 앞세워 빚을 늘리고 있다. 이들 국가는 또 중앙은행이 간접적으로 정부의 빚(국채)을 매입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돈을 찍어 재정적자를 메우는 것이다. 장기물을 중심으로 일본 중앙은행은 총 국채의 약 80% 이상, 미국 중앙은행은 약 60%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까닭에 지난해 학계에서는 현대화폐이론(MMT)도 부상했다. 재정적자는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이론이다. 돈을 찍어 충당하면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국도 가능할까. 결론적으로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가 작고, 저성장·고령화가 심각하고 통일 및 북한 급변 상황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중앙은행 활용도 어렵다. 미국과 일본은 기축통화국이어서 중앙은행이 돈을 많이 찍어도 시장이 수용할 수 있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또 통화량이 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데, 최근 저물가 추세도 미·일의 실험을 돕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한국도 재정정책 기로에 섰다고 본다. 감당할 수준 내에서는 재정적자 증가, 중앙은행 역할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국가채무 비율 40%대를 유지하더라도 재정 준칙을 세워 위기 시 확대, 평상 시 긴축 등의 탄력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도 원화 통화량의 시장 수용 한계까지는 확대 요구가 나올 것으로 전망한다.
홍우형 한성대 교수는 “국가채무 비율 40%대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한계 기준 같은 것”이라면서도 “코로나19 같은 위기 시에는 빚을 늘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중장기 재정 준칙을 만들어 건전성을 회복하는 계획도 함께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한국도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재정적자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기축통화국처럼 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 나름대로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중앙은행의 역할 확대를 꾀하면 정부가 재정 부담을 좀 덜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종=전슬기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