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장 33절에는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라는 말씀이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영원한 희망의 나무 한 그루’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자.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말을 남겼다. 스피노자는 이 말을 통해 희망을 노래했다. 지구의 멸망은 절망과 죽음을 뜻한다. 다만 인간에게 진짜 절망은 희망을 잃는 데 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유대인들이 남긴 글귀 중 이런 게 있다. “양식이 없으면 40일 이상 살 수 없고 물이 없으면 7일을 버티기 어렵다. 공기가 없다면 1분 이상 버틸 수 없다. 희망이 없다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아브라함도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아내 사라가 이삭을 낳은 뒤 아브라함은 자기 의지로 낳은 이스마엘을 내쫓는다. 그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온다. 그리고 아비멜렉과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웠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이야기에 이어지는 창세기 22장에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언약의 씨인 이삭이 나타나니 육신의 씨인 이스마엘이 물러나고 언약의 씨에서 언약의 우물이 난 것만 같다. 그리고 언약 나무가 세워지게 됐다.
이는 복음의 핵심이다. 모든 것이 아브라함이 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됐고 완성됐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라고 하는 언약의 우물에 심은 나무가 이방인을 구하는 희망의 십자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네 이름을 창대한 이름이 되게 해 줄 것이며,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따라 길을 떠났다. 하지만 175세가 된 아브라함이 죽게 됐을 때 자식은 고작 둘이었다. 다른 씨를 통해 낳은 자식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이것만 보면 약속은 깨진 셈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이 보이는 땅을 다 주겠다고도 하셨다. 아브라함은 큰 비용을 지불하고 막벨라 굴을 산 게 전부였다. 그곳에 아내 사라를 매장한 뒤 훗날 자신도 묻혔다. 동서남북은커녕 어둡고 좁은 동굴 하나밖에 얻지 못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대한 이름을 주겠다고도 하셨지만 그는 무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절망하지도 않았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을 뿐이었다. 그 나무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는 희망의 나무였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라며 살고 있는가. 꿈과 성공, 행복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라. 20년 후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가. 성공만을 위해 사는 건 아닐까. 물론 그런 삶도 좋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장래희망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결국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며 바라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성취되면 좋겠지만 그 또한 지나가는 한 순간일 뿐이다. 거기에만 의지하면 허무해진다. 나를 통해 이루려는 것들은 영원한 희망이 될 수 없다.
영원한 희망은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심었던 에셀 나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심으신 ‘십자가 한 그루’가 꺼지지 않는 희망이다. 하나님은 종말 때 심판하신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면서 십자가 한 그루를 심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절망이 아니다. 십자가 나무 한 그루의 의미를 살피지 못하는 게 인간의 절망이다. 오늘도 영원한 희망의 십자가만 바라보시는 여러분 되길 바란다.
이창우 박사 (선한목자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