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불법촬영물 n차 유포’ 탈출기

입력 2020-04-02 04:03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게 시간은 독이다. 불법촬영물을 찾아내 지우는 건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너무 빨리 퍼지고 너무 많이 퍼졌다. 찾아내 지워도 또 올라왔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불법촬영물 피해자인 20대 초반 여성 이수연(가명)씨는 “도망치고 싶었고 지금도 도망치는 꿈을 꾼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이씨는 지난 28일 국민일보와 만나 “많은 피해자들이 숨어서 고통받고 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며 “무엇보다 ‘박사방’ 사건 수사로 디지털 성범죄 대책을 만들어가는 초기 국면에 내 피해 경험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씨는 지금도 2주마다 포털, SNS, 커뮤니티를 구석구석 모니터링한다. 본인이 등장하는 피해물을 주기적으로 검색해서 경찰에 넘기는 일을 무한반복하고 있다. 이씨로부터 디지털 범죄에 맞선, 고통스러웠던 지난 9개월의 이야기를 들었다.

-피해 상황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지난해 7월 지인이 내가 나오는 불법촬영물을 봤다고 알려줬다. 내가 틀림없었다. 검색을 통해 최초 유포범이 지난해 1~5월 1차 유포한 것을 확인했다. 급한대로 휴대전화로 이미지와 게시물 주소를 캡처해 다음 날 경찰서로 찾아갔다.”

-경찰로부터 충분한 도움을 받았는지.

“증거 훼손을 염려해 게시물을 그대로 둔 채 경찰서를 찾았다. 조사 받는 내내 초조했다. 이 순간에도 내 피해물은 계속 유포될 테니. 경찰 수사는 느리고 답답했다. 8개월 동안 수사 관련 연락을 세 번밖에 못 받았다. 지난해 7월 고소했는데 수사관으로부터 처음 연락 온 게 그해 10월이다. 피해자인 내가 2주마다 n차 유포물을 모니터링해 수사관 개인 메신저로 보냈다.”

-그 사이에도 피해물은 계속 유포됐을 텐데.

“수사 도중에 디지털 장의사와 전화상담을 했는데 매달 200만원 넘게 든다더라. 다행히 디지털 삭제를 무료로 해주는 시민단체인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소개 받았다. 이걸로 충분치 않아 삭제 요청을 직접 하기도 했다. 내 피해물이 유포된 사이트 운영자의 IP 국적은 파나마와 투발루였다. 두 곳에 삭제를 요청하는 글을 남겼다. 한 군데는 내 IP를 차단했다. 두 번째 사이트는 못 지운다면서 폭로하든, 고소하든 마음대로 하라더라.”

-n차 유포의 피해는 얼마나 심각한가.

“가장 두려운 상황이 있다. 친구나 가족이 알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11월에 아는 오빠로부터 연락이 왔다. 계속 뜸을 들이더니 불법 토토사이트에서 네 피해물을 봤다고 말해줬다. 고맙다고 답한 뒤 게시물을 신고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첫 유포자 이후 8개월 만에 20번 넘게 추가 유포됐다. 조회 수 2만건이 넘는 게시물도 있었다. 이것도 종합해서 수사 의뢰했다.”

-시민단체가 도움이 됐나.

“상담사를 만나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피해자는 여성단체와 꼭 함께해야 한다. 혼자서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전혀 알 수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서울시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지지동반팀 도움으로 전문 상담사와 일대일로 연결됐다. 전담 상담사가 수사·상담·변호사 자문에 매번 도움을 줬다. 여성의전화도 큰 도움이 됐다. 상담사 안내로 의료비 지원프로그램에 신청했고, 심리상담비를 지원받았다.”

-디지털 피해를 수습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피해물을 스스로 모니터링하는 작업이 제일 괴롭다. 구글에 내 이름·얼굴 사진을 검색해 유포물을 찾는다. 대개 1시간~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처음에는 3일에 한 번씩 검색했다. 그러다 2주에 한 번, 너무 힘들면 한 달에 한 번 검색했다. 피해물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자꾸자꾸 미뤘다. 깨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었다. 16시간 전에 올라온 것도 있고. 분명 이전에는 없었는데 10개월 전 유포물이 이제야 나오기도 했다. 너무 빨리 퍼지고 너무 많이 퍼지더라.”

-피해자로서 편견을 느낀 적은.

“피해자는 피해자다움을 요구받는다. 피해자는 너무 힘들어야 하고, 일상도 무너져 있어야 한다고들 믿는다. 그런 무너진 모습이 피해를 증명한다는 시선도 있다. 나는 사회활동을 하고, 힘들어도 일어서려고 계속 노력한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쟤는 힘들지 않나봐’ 이렇게 판단할까봐 무섭다. 그래서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가벼워질까봐. 그런 게 너무 두렵다.”

-성범죄에 맞서는 다른 활동에도 나섰다는데.

“지난해 말 불법촬영물을 적발하는 서울시 디지털시민모니터링단으로 활동했다. 다른 피해자들을 돕고 싶었다. 피해당사자인 나만큼 이 범죄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피해자를 위해 쪽지상담도 해준다.”

-최근 n번방 사건이 터졌다.

“최근에는 n번방 외신제보 활동을 하고 있다. 범행수단인 텔레그램의 서버는 외국에 있다. 그래서 ‘박사방’ ‘n번방’을 수사하려면 외국수사기관과 서버가 협조해야 한다. 외신에 알려야 한국에서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협조를 구할 수 있다.”

-혼자 앓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는 지금도 도망치고 싶다. 어젯밤에도 도망치는 꿈을 꿨다. 이민 가든지 해서 완전 잊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안 되지 않나. 피해자들에게는 여러분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할머니가 돼서 내가 조금이나마 보탬이 돼 법이 바뀌면 뿌듯할 것 같다. 내가 받은 피해는 누구도 보상해줄 수 없다. 죄인을 제대로 처벌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 달라. 그게 사회의 몫이다. 미국처럼 범죄자들에게 징역 300년쯤 선고했으면 좋겠다.”


이성훈 기자 tell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