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공산군의 남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서쪽 옹진반도부터 공격을 시작해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으로 확대됐다. 옹진반도는 국군 제17독립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6월 25일 새벽 4시가 되자 북한은 30분간 옹진반도를 향해 엄청난 양의 화력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아직 조용했다. 새벽 5시가 돼서야 38선 전역에서 포사격이 이뤄졌고 30분이 지나서야 일제히 38선 전 지역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옹진반도는 왜 다른 지역보다 한 시간 먼저 공격이 이뤄졌을까. 이는 북침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6·25전쟁의 남침시각이 새벽 4시냐 또는 5시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에 북한의 기막힌 계략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인 배영복 장군은 ‘전쟁과 역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전면 남침 시각을 6월 25일 새벽 4시로 알고 있다. 그러나 새벽 4시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공격개시 시간이 ‘6월 25일 5시’라는 근거는 여러 군데서 발견됐다. 포로를 통해 획득한 기밀문서들 속에서 공격시간은 ‘5시’라고 기록한 메모 수첩이 여럿 발견된 것이다.
적 2사단의 경우 공격 개시 시간을 ‘05:00’로 기록했고, 전투유공자 표창을 올리는 문서에도 5시로 돼 있다. 적 2사단 자주포대대 3중대 1소대장 박영희의 공적서는 ‘1950년 6월 25일 5시부터 상부의 명령에 따라 38도선 전투에서 성과는…’으로 시작된다.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있다. 이날 KBS라디오는 북한의 남침 소식을 알리는 첫 방송(7시 뉴스)에서 ‘6월 25일 새벽 5시’라고 발표했고, 12시 뉴스에서는 ‘아침 5시부터 8시 사이에 남침해 왔다’고 보도했다. 이는 육군본부 상황실의 통보를 받고 국방부 정훈국장(이선근 대령)이 직접 보도 문안을 작성한 뉴스였다.”
이렇게 볼 때 전면 남침 시각은 4시가 아니라 5시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전면 남침 시각으로 새벽 4시가 정설이 된 것은 옹진반도 포격시간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옹진반도는 다른 지역보다 1시간 먼저 공격을 받았을 뿐이다.
새벽 4시에 38선 모든 지역이 아닌 옹진반도에만 30분에 걸쳐 포사격이 시작된 것은 옹진을 지키는 국군 17연대로 하여금 해주로 북침하도록 미끼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17연대가 조금이라도 북으로 공격해 들어오면 그를 빌미로 38선 전역에서 총반격을 개시한다는 시나리오가 설정돼 있었다.
그러나 17연대는 초전에 와해돼 반격은커녕 사상자 추스르기에 급급했다. 결국, 2719명 중 750명의 사상자를 내고 25일 저녁 육군본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다. 17연대는 해군수송선을 타고 26일 아침 인천으로 철수했다. 17연대가 해주를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불발됐다.
그로 인해 김일성은 새벽 5시를 기해 38선 전역에 걸쳐 30분간 포사격을 감행했고 5시 30분부터 전면 남침을 개시한 것이다.
보병으로 참가한 인민군 병사 중에 시인이 있었다. 그가 지닌 수첩에서 여러 편의 ‘전쟁 시’가 발견됐는데 이렇게 기록돼 있었다.
“몹시도 기나긴 38선의 밤 빗발이 쏘다지는 속에서 하룻밤을 새는구나 때는 엄숙한 시간이 찾아왔다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는 아침 하늘… 우리들은 전 인민과 함께 적의 포연탄우 속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는 아침 하늘’이란 새벽 5시 30분 이후의 시간을 의미한다.
김일성은 측근에게도 남침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6월 25일 새벽 3시에 비상내각 회의를 소집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동지들, 매국 역적 이승만 군대가 38선을 넘어 공화국에 1~2㎞를 무력침공 해왔습니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군대에게 반격명령을 내렸습니다. 승인하는 결정을 채택하여야 합니다”라고 제안했고, 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채택됐다.(전 내무성 차관 강상호의 증언) 그 후 새벽 4시에 옹진반도에 대한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각료들까지 속인 참으로 기막힌 계략과 연출이다.
북한이 남침 사실을 아무리 은폐하려 해도 증거가 많다. 총사령부가 사단에 내린 정찰 명령 1호(1950.6.18)와 전투명령 1호(1950.6.22)가 있다. 소련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김일성의 남침 사실이 밝혀졌고, 1992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러시아 교과서는 ‘6·25전쟁은 북한에 의한 남침’이라고 명시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 유성철 이상조의 증언 등 많은 증거가 있다.
김재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