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죄 해석은 법조계의 해묵은 과제다. 이 죄목의 까다로움은 유서가 깊다. 대법원은 1954년 9월 23일 최초의 직권남용 확정판결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대법원은 철도경찰대 소속 경찰관이 수하물의 운임을 받은 것을 두고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후세의 법률가들은 경찰관의 직권과 전혀 관계없는 권한을 남용한 것은 직권남용이 아니므로 타당한 판단으로 볼 수 없다고 봤다. 사법부는 직권남용이란 죄를 다루는 데 있어 첫 스텝부터 꼬였던 것이다.
적용 난이도와 무관하게 직권남용죄의 쓰임새는 점차 커져가는 형국이다. 재판이 막 시작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은 직권남용이 핵심 쟁점이 된 사건이다. 지난 사법부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필두로 한 전·현직 법관들이 받고 있는 핵심 혐의도 직권남용이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에서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이 받은 혐의 또한 직권남용이다. 여론의 관심은 떨어졌지만 아직 1심 재판이 진행 중인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역시 직권남용을 적용한 사건이다.
검찰 내부에선 직권남용죄가 부각된 계기를 ‘사법농단 의혹’ 수사로 꼽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 특별수사의 트렌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은 당시 특수1·2·3·4부를 총동원해 수사를 벌였다. 직권남용이란 용어가 연일 언론 보도를 뒤덮었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간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둘러싸고 선거법 위반·뇌물·횡령·배임으로 발전하던 한국 사회 고위층의 범죄가 이제는 무형의 권리 개입으로 도약했고, 이를 현행 형법의 잣대로 가늠할 수 있는 직권남용이 대안으로 부상했다는 게 검찰 고위 간부들의 관전평이다.
그러나 검찰의 기대와 달리 직권남용이 죄명으로 적힌 공소장을 대하는 법관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최근 사법농단 의혹으로 기소된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현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1심 무죄는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양 전 대법원장이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직권남용 범행 구조와 유사하기에 더욱 그렇다.
임 부장판사는 일선 법관의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판사 송인권)는 지난 2월 14일 재판개입 혐의에 대해 “‘위헌적 행위’로 징계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직권남용을 적용하는 것은 확장해석”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 개입을 직권남용으로 처벌하려면 재판 업무에 관한 직무감독권이 전제돼야 하는데, 사법행정권에 재판 업무에 관한 직무감독권이 없어 직권남용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용할 직권 자체가 없었으므로 무죄라는 취지였다. 판결 직후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직권남용 판단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대법원은 점차 직권남용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추세다. 직권남용죄는 ①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②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경우에 성립한다. 그간의 직권남용 판결의 법리논쟁은 전자에 집중돼 있었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않던 후자 ‘의무 없는 일’에 대해서 판례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직권’ 부분을 엄격히 판단하는 데 이어 ‘의무 없는 일’까지 좁게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쐐기를 박은 건 지난 1월 30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의 파기환송 판결이었다. 전합은 여기서 의무 없는 일에 대해 엄격한 조건을 제시했다. 전합은 공무원의 직권남용 범죄에 있어 하급자가 법령에 따라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단순히 상급자가 직권을 남용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제로 어떤 의무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한 것인지 깐깐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취지였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의 예고편격인 ‘사법농단’ 하급심에서 무죄가 나오고 대법원에서도 직권남용의 적용범위를 좁혀 나가자 검찰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 공판부 검사는 “제일 우려되는 건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이라고 했다. 다른 부장검사는 “‘제 식구 감싸기’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설령 무죄가 나오더라도 권력층의 무형적 범죄에 대한 예방효과는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온다. 직권남용의 적용이 까다로워지더라도 기소할 실익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대 흐름에 따라 ‘직권남용형’ 범죄가 우후죽순 불거지는데 이를 방치할 순 없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직권남용의 남용’이라는 싸늘한 비판이 나온다. 오히려 검찰이 직권남용을 빈번하게 적용하면서 법원이 더욱 보수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법조계에서는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직권남용 법리를 집대성할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전원합의체 재판장이자 대법원장으로서 광범위한 사법행정권을 갖고 있었던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다른 법관들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입법자들이 직권남용죄를 만든 이유가 있다. 적용이 까다롭다고 해서 없는 죄는 아니다”고 말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