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디지털 성범죄, 인식부터 바꿔야

입력 2020-03-31 04:09

정부도 언론도 전문가들도 모두 ‘텔레그램 n번방’에 대해 뜨겁게 이야기하고 있다. 성착취 영상 공유를 넘어 10대들을 협박해 직접 성착취물을 만들어 수익을 올린 사람들의 악랄함과 끔찍함에 모두 치를 떨고 있다. 그 비밀방에 적극 가입해 성착취물을 공유하고 영상에 찍힌 피해자들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누적 26만명으로 추산된다는 대책위 발표는 사람들을 더욱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평범함의 가면을 쓰고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누군가가 비밀방에서 아동의 성을 착취하는 ‘괴물’이자 ‘악마’일 수 있다는 깨달음은 곧 500만명 넘는 국민청원으로 이어졌다. 청원 내용은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우기, n번방 가입자 전원 신상공개, n번방 운영자·가입자 전원 처벌 등이다. 법무부와 경찰도 주도자 몇몇만이 아니라 참가자들까지 처벌하기 위해 범죄단체조직죄나 교사·방조 등 관련 규정을 적극 적용하겠다고 다짐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그간의 가벼운 처벌 역시 도마에 올랐고, 다음 달 발표가 예정된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n번방은 온라인 공간에서 무수히 반복됐던 성범죄다. 2015년 국내 최대 음란물 사이트 소라넷 역시 인증 과정에서부터 일명 몰카 업로드를 요구하기 때문에 등급을 올리기 위해 참여자들은 가족이나 연인, 지인들의 불법 촬영물을 제작해 유포했다. 소라넷 게시판에서 ‘골뱅이’(만취 여성)를 대상으로 한 준강간 모의 및 중계가 이뤄지기도 했다. 일부 대학에서는 남학생들이 단톡방을 개설해 같은 과 여학생 이미지를 공유하고 외모 품평이나 성희롱 언사를 했던 일명 ‘카카오톡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있었다. 수업을 같이 듣는 여학생 한 명을 선택해 단톡방에서 반응을 공유하고 모욕하고 성희롱하는 게임이 문제되기도 했다.

단톡방에 불법 촬영물과 강간 경험을 공유했던 정준영 등 남성 연예인들의 디지털 성범죄 사건도 있다. 노출 이미지에 아는 여성의 얼굴을 오려 붙여 신상정보와 함께 유포하고 성희롱하는 지인능욕도 오랫동안 문제제기됐던 성범죄다. 이번 n번방은 유포 매체와 접속 방식을 달리한 이전 디지털 성범죄의 결정체다.

온라인 공간이 생활영역인 디지털 세대들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끊임없이 고발하고 처벌을 촉구해왔다. 2018년 6차례 이뤄진 ‘불법촬영 편파수사·편파판결 규탄시위’에 참여한 여성의 수는 누적 30만명이었다. 이 숫자들이 말해주듯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은 성별에 따라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 남성들에게는 집단놀이 문화이지만 여성들에게는 온·오프 공간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끔찍한 범죄인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뽑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식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의 몸을 대상화해 즐기는 것으로 이해되는 남성들의 집단적 성적 놀이 문화에서는 성착취물 제작·유포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유흥업이며 공유는 유희일 뿐이다. 이 인식은 처벌이 가벼운 이유이기도 하다. 범죄라는 인식없이 자유롭게 다양한 성적 일탈을 즐겼던 이들을 처벌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게 그간 사법기관의 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법기관은 대상이 된 여성들이 진정한 피해자인지를 확인하는 데 골몰해왔다. 가해자가 접근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거나 폭행·협박에도 저항하지 않았다면 진짜 피해자가 아니므로 가볍게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 있다.

이제라도 디지털 성범죄를 강경 처벌하겠다는 정부와 사법기관의 태도는 적극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아동이거나 ‘진짜 피해자’라서 혹은 500만명이 넘는 여론이 26만명을 악마라고 호명한다고 해서 적극 대응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여성을 인격이 아닌 도구로 취급하고 즐기기 위한 대상으로 삼으면서 인간 존엄성에 기반한 헌법 질서를 훼손하기 때문에 처벌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