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배 총장의 신약성경 올레길] 사도 바울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계시다’ 선언

입력 2020-03-27 18:54
침례신학대학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지난 16일 개강해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3일 목련꽃이 핀 교정에서 조교들이 인기 드라마 제목을 패러디한 ‘하기동 클라쓰’라는 문구를 들고 학생들을 기다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침신대 제공

때로는 가파른 골짜기, 때로는 은혜의 강물을 만났던 신약의 올레길을 따라가니 어느새 복음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열매를 맺고 있다. 성령을 통한 복음 선포와 교회 설립과정을 보여주는 신바람 나는 사도행전을 지나 로마서에 도달하면 잠시 숨을 돌리고 잘 정리된 칭의 성화의 보고를 만난다.

그러다 고린도 서신을 읽을 때 갑자기 쏟아지는 초대교회 문제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사도행전이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는 성령체험에 대한 선포라면 고린도전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다. 사도행전이 임하시고 부어주시는 성령에 대한 강조라면 고린도전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나타나심에 대한 강조다.

항구도시로 교통의 요지였던 고린도는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뒤섞여 사는 지역 특성상 도덕적·윤리적·종교적 타락이 성행했다. 당연히 복음은 기존의 문화와 충돌했고 지역문화와의 충돌은 복음의 꽃을 피워내기 위해 극복해야 할 꽃샘추위였다. 특히 당시 문화권에서 내주하는 성령의 나타나심은 매우 생소한 현상이었고 높은 윤리성이 요구되는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방식도 실천하기 어려웠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했다. ‘사랑’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3)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말씀 중 하나가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13장인데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을 말하는 13장은 은사를 다루는 12, 14장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사랑은 은사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 없는 은사가 문제인 것처럼 은사 없는 사랑도 문제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반응이다. 13장의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성을 위한 가르침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이다. 만일 은사적인 측면을 배제한다면 13장은 윤리적인 가르침에 불과할 것이다.

더불어 고린도 서신은 신앙 공동체 안 은사 활용의 문제를 다룬다. 당시 초대교회에 있었던 생생한 성령 역사의 증언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간혹 은사 체험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에 있는 이들은 체험은 성경에 비춰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체험을 비춰주는 고증문서인가 아니다. 성경은 체험을 발생시킨다.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동일한 성령의 체험만이 성경 말씀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결국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방언과 예언을 위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 활용을 제시하는 것이다.(고전 14:40)

고린도를 향한 바울의 선언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계시다는 것이다.(고전 3:16) 신을 형상화했던 헬라-로마 사회나 하나님을 성전에서 모셨던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여기서 더 대담하게, 지존하신 하나님 그분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바로 그 성령이라고 선포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한 바울의 생생한 ‘체험’이 이러한 대범한 선언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저 멀리 계신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바울의 간증 같은 선포는, 혼잡하고 타락한 다문화 상황의 고린도 교인들에게 임하신 성령은 이제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우리의 믿음의 생활 속에 늘 함께하시는 삶의 동력이 된다는 권면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 반영된 상황은 무엇일까. 복음전파 현장에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복음의 대적 요소로 등장한다. 유대인이 된 후 구원을 이룰 수 있다거나 구원받은 자는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복음의 본질인 구원과 관련해 논쟁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유대인의 달과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는 도전이다.(갈 2:4, 4:10, 5:2~3, 6:12~13) 복음과 율법주의와의 충돌이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복음을 통한 구원, 율법준수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강조한다.

바울은 자신이 이미 극복한 율법의 경험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스며든 유대인의 의식 준수와 율법 강요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교정한다.

사도행전에서 본 성령의 생생함은 로마서를 지나 고린도서에 이르러서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성령체험이 깊어질수록 성경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고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신학 논문과 저서로 파악되지 않던 내용이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확실하게 인식되고 정리되는 것이다. 복음은 문화와 환경에 따라 상황화됐지만 단순히 복음의 내용 전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과정 속에 함께하셨던 성령의 임재 역사로 이루어졌다. 이런 성령임재의 역사가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지속하기를 간구하는 믿음의 기도와 함께 올레길의 여정을 계속해 보자.


김선배 침신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