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예술가들은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입력 2020-03-28 04:04 수정 2020-03-28 04:44
예술은 소통하고픈 욕구의 발로다. 또 코로나19 여파로 멈춰버린 사람 사이의 접촉과 교감을 가능케 하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사진은 최근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 중인 이탈리아에서 시민들이 발코니로 나와 플래카드를 들고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민의 자발적 협조와 국가의 공격적인 억제 정책 덕분에 확진자 수는 살짝 감소하는 듯 보이지만 대신 해외 유입 사례가 더 늘어나고 있다. 우리만 노력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잠시만 인내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우리의 막연한 기대는 이제 접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즉, 더 이상 예전의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석으로 객석이 가득 찬 가운데 북적거리는 공연장의 뜨거운 열기도, 내한한 해외 아티스트의 화려한 연주도 당분간 현장에서 체험할 수 없다. 2m 간격을 유지하는 ‘사회적 거리’와 실내에서의 마스크 착용은 만국의 공통 에티켓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공연장에서 무엇을 보았는지가 아니라 지난 밤 포털 사이트에서 어떤 공연 중계를 보았는지를 마치 지난 밤 TV 영화를 본 듯 떠들게 될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나 익숙하다고 여겨졌던 영상문화가 싫든 좋든 만인의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가 코로나 덕분에 한 발 더 당겨진 것이다. 설령 백신이 기대한 것보다 일찍 개발되어 전염병을 극복하게 되더라도, 장기간 지속된 예외적인 상황은 새로운 일상으로서 틀을 잡게 될 확률이 높다.

공연장과 공연 단체들은 새로운 수익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이미 내로라하는 극장들이 마케팅을 목적으로 부수적으로 제작해 놓은 각종 영상물을 쏟아내고 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로열 오페라, 베를린 필하모닉, 빈 슈타츠오퍼가 멋지게 제작해 놓은 영상물들을 기회다 싶을 만큼 대거 방출하며 미래의 소비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들 자신도 공연장이 다시 문을 열 때까지만 제공하는 일시적인 위로 서비스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전염병 사태가 터진 이후 부랴부랴 급조해서 만든 영상물이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 보인다.

공연예술가들 또한 무대와 객석이라는 고전적이고 익숙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도태될 확률이 높다.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예술가와 단체들이 티켓 수익이 아닌 국가의 지원금으로 연명해오고 있었지만, 이번 사태에 새로운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정말로 도태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당장은 생계 유지비가 절실하겠지만 국가의 세금은 화수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들은 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확실히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다.

코로나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장기불황의 신호는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예술가들은 사회가 부유할 때만 취미생활을 위해 필요한 천덕꾸러기들인가? 이 싸늘한 질문에 나는 그들이 자신 있게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예술가들이 겪는 창조적 고통을 소통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예술은 나의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이해받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리적으로 격리돼 있는 이 ‘사회적 거리’는 무형의 예술 정신으로 채울 수 있다. 이탈리아 국민이 이 어려운 시국에도 발코니에 매달려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라. 당신의 고통이, 당신의 고독이 당신만의 것이 아님을, 전염병의 부산물인 혐오와 차별을 날려버리고 우리가 마음만은 함께 있음을 알리는 노력은 오로지 예술로서 가능하다. 다만 감동의 전달방식만 달라질 뿐 예술은 여전히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예술가들이 증명해주길 바란다. 3년 남짓 문화와 예술 이야기를 풀어온 ‘인사이드 아웃’ 칼럼은 오늘로 끝이다. 이 땅의 예술과 문화가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화하고 번창하길 빈다.

(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