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을 극복하기 위해 시민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이어가고 있다. 어느새 사람들은 휑한 거리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게 필수불가결한 일이라는 건 자명하다. 하지만 오가는 발걸음이 뜸해진 번화가에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민일보는 어려운 나날을 감내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지난 16~17일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 12곳에서 스무명의 소상공인을 만났다. 그들이 들려준 ‘번화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국민일보가 찾아간 번화가는 서울 여의도, 홍대, 신촌, 이대, 이태원, 후암동, 광화문, 종로, 을지로, 신사동, 논현동, 역삼동 일대다.
회식이 사라진 거리(광화문, 을지로, 여의도 오피스가)
16일 오후 12시. 서울 중구 을지로의 식당가에서 직장인 4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 여기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다른 데 가자.” 식당엔 테이블 3개 정도가 차 있었다. 왜 굳이 다른 곳으로 가느냐고 물으니 김정은(41·여)씨는 “예전엔 뭐 먹을까 고민했는데, 요즘은 무조건 ‘사람 적은 식당’에 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서울 을지로, 종로, 광화문, 여의도, 역삼동 등으로 대표되는 주요 오피스가의 점심 풍경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소상공인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그래도 점심 장사 덕에 버틴다”는 것이었다.
서울 중구 정동에서 만난 60대 식당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원래 예약 위주로 운영되는데 요즘은 예약 자체가 없어요. 월요일에 어느 분이 전화를 합디다. 예약할 수 있느냐고요. 내가 말을 못 했어요. 목이 메서. 겨우 가다듬고, 예약이 뭡니까, 손님. 무조건 오십시오. 이랬습니다.”
소상공인연합회 빅데이터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유동인구는 200만명으로 지난달 9일 930만명에서 78.5%나 급감했다. 유동인구 급감은 소상공인들에게는 직격탄이 됐다.
여의도에서 만난 한 20대 직원은 “여기는 단골이 많은 곳인데 단골들도 안 온다”며 “코로나 사태 전과 비교하면 반도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회식 등 단체 예약 위주로 운영되던 광화문의 한 대형 식당은 매출이 10분의 1토막 났다. 550석 규모로 2개층을 운영했지만 지금은 1개층만 쓴다. 이 식당 매니저는 “직원이 40명에서 20명으로 줄었다”며 “장사가 잘되면 신나서 일하는데 죽을 쑤니까 종업원들도 눈치만 보고 있다”고 했다.
떠밀려 걷지 않아도 되지만, 반갑지 않다(홍대 일대)
저녁시간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9번 출구는 떠밀려 올라가던 곳이었다. 16일 오후 8시,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에 섰다. 9번 출구를 오르내리는 이들은 고작 10명 안팎. 홍대 거리의 한 화장품 가게 직원은 오후 8시가 조금 넘자 문을 닫고 있었다. 옷가게는 대부분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오후 9시20분쯤 홍대의 유명한 곱창거리는 한산했다. 27년 된 곱창집에서 만난 김모씨(62·여)는 “이렇게 힘든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하루 매출이 적어도 300만원, 많게는 700만원 나왔는데 요새는 70만원도 찍어요. 지금은 그냥 텅텅 비었죠. 외국인 손님이 많았는데 하나도 안 오니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안 오고.”
서울 서대문구 신촌과 마포구 이대입구 주변은 개강이 미뤄진 대학가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졌다. 길거리 닭강정집을 운영하는 50대 남성은 “매출 ‘0원’을 찍은 날은 속상해서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며 “그래도 별다른 수가 없으니 나와야지 어쩌겠느냐”고 했다.
신촌역 근처에서 돈가스집을 운영하는 강민정(49·여)씨는 “신촌은 주말마다 무슨 행사를 하는데 그게 싹 사라지니 주말 장사가 너무나 힘들어졌다. 30만원 벌면 인건비는 나왔다고 좋아해야 하는 지경”이라고 했다.
이대 앞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는 한 여성(62)은 “이 주변 옷가게들은 1주일 내내 개시도 못한 곳이 많아 아예 안 나오기도 한다”며 “그래도 요새 방역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몇 달 뒤에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은 있다”고 했다.
높은 임대료가 겁나는 사람들(강남역과 가로수길)
그나마 활기가 느껴졌던 곳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역삼동 등 강남역 일대였다. 17일 오후 강남역 근처의 교보문고와 알라딘 중고서점엔 사람들이 적잖이 보였다. 스타벅스에 사람이 몰리는 것처럼 서점도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공간이 된 듯했다.
오후 3시쯤 일찌감치 문을 연 한 선술집에 들어갔다. 주인 이모(73·여)씨는 임대료 걱정부터 털어놨다. “이 근방 임대료는 비싼데 한 달에 4000만원도 한다. 임대료도 못 내지, 요즘 같아선. 그런데 임대료 내려준다는 곳도 없고.”
강남역에서 한 프랜차이즈 식당을 운영하는 변모(67·여)씨는 “3월에 단체 예약은 다 취소됐다”며 “이럴 줄 모르고 직원을 채용했다가 더 일 못하겠다고 말하는데 어찌나 미안하든지…”라고 했다.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일대는 신촌이나 이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화장품 매장, 옷가게, 카페 등에 사람이 한 명도 없거나 한두 명 있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붐비는 곳은 애플스토어였다.
한 옷가게에서 만난 40대 여성은 “매출이 평소보다 5분의 1도 안 된다”며 “임대료 내기도 힘든데 외국인들이 와야 한다”고 말했다.
을씨년스러워진 글로벌 타운(이태원과 경리단길)
16일 오후 10시쯤 이태원은 텅 빈 느낌이었다. 음식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술집과 바에만 사람이 조금씩 있는 정도였다. 외국인과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글로벌 타운’ 이태원에서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졌다.
이태원의 한 바에서 만난 유모(23)씨는 이태원을 잘 아는데 이런 적은 없었단다. 유씨는 “여기 월세가 750만원인데 그나마 건물주가 조금 깎아줘서 이 정도다. 하루 종일 한 팀만 있는 경우도 많다”며 “이 일대는 다 그만그만하다”고 했다.
기자가 이태원에서 목격한 외국인은 5명도 채 되지 않았다. 용산구 후암동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게스트하우스를 하는 차모(41)씨는 “코로나가 팬데믹 상황까지 왔으니 당분간 이태원 쪽은 계속 힘들 것 같다”며 “게스트하우스도 개점휴업이고, 음식점들이 비싼 월세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문수정 정진영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