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지방시대] 전국이 ‘정책 연구소’ 변신… 상금 13억 걸린 정책 공모전 본격화

입력 2020-03-16 20:27
미국 정부의 오랜 난제 ‘미국 알래스카 앞바다 초대형 기름 유출 사태’를 해결한 건 한 시멘트 회사의 엔지니어였다.

대형유조선 엑슨발데스호가 1989년 알래스카 앞바다에서 좌초돼 25만 배럴의 기름을 쏟아내면서 주변 해안을 뒤덮었다. 낮은 기온에 기름과 물이 엉겨 붙어 원유 제거에 난항을 겪었다. 20여년 동안 바다새 25만마리, 바다수달 2800마리, 대머리독수리 250마리 등 생물들이 대규모 폐사했다.

뾰족한 해법이 없던 미국 정부는 2만달러의 상금을 걸고 해법을 공모했다. 전 세계 과학자·엔지니어들이 쏟아낸 수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살아남은 게 시멘트 회사 엔지니어가 낸 짧은 아이디어였다. 그는 시멘트를 굳지 않게 하기 위해 레미콘을 돌리듯, 기름도 진동기계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면 된다는 묘책을 내고 2만달러를 거머쥐었다.


대규모 상금을 내건 정책 공모전이 한국에서도 본격 추진된다. 행정안전부는 다음달 총 상금 13억원의 정책 오디션 ‘도전. 한국’ 아이디어 공모(포스터)를 시작한다고 15일 밝혔다.

정해진 과제에 대해 번뜩이는 아이디어만 내면 누구에게나 최대 5000만원의 상금이 돌아간다. 미국의 온라인 공모 플랫폼(Challenge.gov·챌린지 닷 거브)의 ‘문제 해결방법 제시-보상’ 구조를 벤치마킹했다.

해외교민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인터넷이 되는 모든 곳에서 응모할 수 있다. 전국이 정책 연구소, 전 국민이 정책 연구원이 되는 셈이다.

공모 주제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행안부는 지난 2월 12일부터 지난 6일까지 정부 홈페이지 ‘광화문 1번가’에서 주제를 공모해왔다. 국가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해결이 어렵거나,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문제가 대상이었다. 단 개인 간 이해관계가 얽혔거나 정치적 성격이 강한 문제 등은 제외했다.

접수 주제는 대부분 미세먼지와 블랙아이스 등 특정 문제에 수렴했다. 환경 분야에서는 해양 쓰레기와 층간소음·미세먼지 문제, 교통·안전 분야는 블랙아이스와 횡단보도 및 교차로 사고, 소각산불, 소방차 전용공간 불법주차 문제, 보건·복지 분야는 감염병 예방 학교청소년 자살예방, 헌혈 활성화 문제가 다수 올라왔다.


행안부는 조만간 10개 안팎의 과제를 최종 선정하고 관련 해법을 공모할 계획이다. 최종 선정된 아이디어 제출자들에게는 과제 난이도에 따라 1000만~5000만원씩, 전체 3억원을 지급한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제 정책·사업으로까지 발전시키길 원하는 이들에겐 상금과 더불어 아이디어 숙성 및 연구지원비가 지급된다. 해당 지원비는 과제별 최대 1억원씩 총 10억원 규모다.

최종 아이디어로 채택되기 위해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전문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게 유리하지만, 반드시 이런 조건을 갖춰야하는 것은 아니다. 행안부 관계자는 “개선 여지가 충분한 아이디어라면 구체성·전문성이 떨어지더라도 무방하다”고 설명했다.

다음달부터 6월까지는 선정된 주제에 대해 본격적인 아이디어 공모·평가·시상이 이뤄진다. 광화문 1번가에 회원가입한 뒤 각종 아이디어를 제출하면 분야별 전문위원들이 평가해 최종 아이디어를 고른다. 연구개발(R&D) 지원 등 추가 연구가 필요한 아이디어와 이미 그 자체로 완결된 아이디어의 구분, 상금과 상장 수여도 이 때 이뤄진다.

7월에는 아이디어 숙성 지원 단계에 돌입한다. 정부 각 부처 공무원들과 전문가가 참여해 아이디어 구체화 방안을 모색한다. 계획이 완성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R&D를,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시제품 제작을 지원한다.

‘도전. 한국’의 모델이 된 미국 챌린지 닷 거브는 2010년 오바마 정부의 ‘열린정부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돼 사회문제 해결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 윤종인 행안부 차관
“A4용지 한 장짜리 보고서도 훌륭한 제안이 될 수 있다”


사진=최종학 선임기자

총상금 13억원이 걸린 대국민 정책 오디션 ‘도전. 한국’을 이끌어온 윤종인(사진) 행정안전부 차관은 “공무원이 주도하는 사회문제 해결 방식은 안 먹힌 지 꽤 됐다”며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기존 틀을, 선을 한번 넘어보자는 게 도전. 한국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국민 참여가 핵심임을 잘 알고 있다”며 “A4용지 한 장짜리 그림이라도 상관없으니 일단 들어오라”고 당부했다.

윤 차관은 지난달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아이디어 숙성은 정부와 전문가들이 도울 테니 걱정 말라”며 “완벽한 보고서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며, 양식 등 제약조건이 전혀 없으니 완성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도전. 한국’은 엉성하더라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최대한 끌어모으는 게 목표다. 윤 차관은 “특정 업계의 상식이 다른 분야에서는 귀한 아이디어가 된다”며 “‘내 아이디어가 가치 있구나’라는 경험을 한 국민이 늘수록 참여도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금 외에도 다양한 인센티브를 마련할 계획이다. 참여 인증서를 나눠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도전. 한국’에는 40여명의 전문가가 아이디어 숙성을 지원한다. 이 과정에서 제안자의 취지가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윤 차관은 “제안자가 직접 자신의 아이디어가 실체화·변형되는 걸 볼 수 있도록 전문가 논의과정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경쟁 과정까지 공개하진 않는다. 국민 투표로 최종 아이디어를 선정하는 식의 절차도 없다. 민간 전문가 집단이 최종 아이디어를 선정하고 시상식 때 해당 내용을 공개한다. 윤 차관은 “아이디어 공개를 꺼리는 이들이 많을 것 같아 일단 올해는 경쟁 과정을 비공개할 예정”이라며 “추후 국민투표라든지, 아이디어 숙성 과정 유튜브 중계 등 다른 흥행요소 도입을 검토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