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없는 천국? 퇴근 없는 지옥?… 한국형 ‘스마트워크’ 시험대

입력 2020-03-14 04:00

광고대행사 직원 김재경(가명·26)씨는 재택근무 1주일 차다. 오전 9시30분에 SNS 단체채팅방에 당일 처리해야 하는 업무 목록으로 출근보고를 하며 근무가 시작된다. 담당자와 수시로 메신저를 이용해 연락하며 기획안을 써보내고, 수정 요청을 한 뒤 상사의 검수를 거쳐 팀장에게 보고를 올린다. 점심은 주부인 어머니가 차려주신 집밥을 먹거나 혼자 해결한다. 팀장의 검토가 끝난 뒤 결과물을 클라이언트에게 보내면 대개 하루 일과가 끝난다. 김씨는 처리한 업무를 단체채팅방에 보고하며 ‘퇴근’한다. 이 모두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변한 일상이다.

모 연예기획사 신입사원 A씨(28)는 지난달 입사하자마자 재택근무가 시작됐다. 미팅이나 점심 등 소수의 외부 일정을 제외하면 자택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고, 보고 없이 자리를 이탈하면 무단 결근 처리된다. A씨는 함께 일하는 선배들과 아직 제대로 말문도 트지 못한 상태다. A씨는 “팀원들과 식사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얼굴을 익혀야 적응을 할 텐데 시작부터 좀 불안하다”며 “회사에 나가서 일하는 편이 효율이 높고 커뮤니케이션도 잘 된다. 빨리 재택근무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는 한국 사회 직장인들의 근무 형태를 빠르게 바꿔놓고 있다. 바로 재택근무다. 13일 국민일보 취재 결과 많은 직장인들은 직접 출근하는 것과 비교해 재택근무가 업무 효율 등에서 딱히 모자랄 게 없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다만 직종마다 어떤 식으로 이를 운용할지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재택근무를 실천하고 있는 모든 업무 현장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기업 문화나 환경이 열악한 경우는 역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업종 특성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도 있었다.

업무량이 많기로 유명한 식품업계 기업 사무직 B씨(28)는 “사무실 출근 때는 정시 근무가 지켜졌지만 재택근무 중에는 ‘내일 9시에 보고해’ 하는 식으로 지시가 내려온다. 집에서 야근하라는 얘기”라고 토로했다.

사진=게티이미지

회사와 집 컴퓨터를 연결하는 원격 프로그램이 원활하지 않아 업무처리 시간은 배로 늘었다. 보안 프로그램도 없고 서류 양식까지 갖춰진 게 없어 모두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B씨는 “재택근무자가 여태 회사에 없어서 그런지 일을 하려 해도 환경이 안 갖춰져 있다”고 말했다.

생산 업종에서는 출근자들의 책임이 무한대로 과중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최근 회사 주변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반도체 설비공장 직원 C씨(28)가 속한 팀은 주야간 2교대로 절반씩 재택근무 중이다. C씨는 “반도체 업종은 가동을 멈출 시 매출 손실이 매우 크다. 출근한 직원들의 현장 관리 부담이 너무나 크다”고 말했다. 그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업무관리 프로그램만 틀어놓은 채 TV나 영화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서도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재택근무도 금방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대형 회계법인 직원 D씨 역시 재택근무가 업무상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D씨는 “맡은 업무가 프로젝트에 기반한 것이라 팀원들끼리 소통이 많이 필요한데 그룹 전화로 회의를 매번 하다보니 말이 혼선될 때도 있고 끊길 때도 많아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말했다. D씨는 “보고서 제출 마감은 예전과 똑같은데 집에서 일하다보니 업무 효율이 낮아져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보고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학계에서는 코로나19 사태가 한국 특유의 직장문화 탓에 실천되지 못했던 ‘스마트워크’(smart work·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시간이나 장소 제약 없이 일하는 근무 방식)를 실험할 계기라고 본다.

박순애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번 일이 일종의 실험이자 기회”라고 설명했다. 반강제적으로 적용된 지금의 근무체제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킬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기술적으로는 이미 스마트근무를 현실화시키는 데 아무 걸림돌이 없어진 지 오래”라며 “실제 필요에 의해 사회 전체적으로 광범위하게 실현되고 있는 만큼 어떤 식으로 정착될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간 한국의 직장문화에 ‘공간 유연성’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근무시간은 다양하게 적용되어 왔지만 근무 공간은 항상 사무실에 묶여 있었다는 설명이다. 김광현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한국의 ‘고맥락’ 소통 방식은 표정이나 말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면대면을 선호한다”며 “문서 자체도 외국은 서류로 파악하기 쉽게 구체적으로 작성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이동시간도 외국에 비해 짧기 때문에 가급적 대면해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영향도 있다”고 설명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의 디지털 인프라가 선진국 수준이라고 하지만 구멍 난 부분도 많다”면서 “일과 생산성의 문제, 장소가 고려돼야 한다면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사측이 고민해야지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려 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 역시 “시간 단위로 처리해야 하는 업무 범위가 명확한 분야라면 적합하겠지만 대민 업무 등 그렇지 않은 분야는 더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새로운 경험의 기회로만 보기보다 고용주들의 인식을 바꿔놓을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 교수는 “결국 한국에서 스마트워크가 실현되지 않았던 건 관리자(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임 교수는 “한국의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걸 눈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안심한다. 경영 생산성 자체가 크게 떨어지는 이유”라며 “관리업무 등 일터에서의 혁신이 진행되지 않아왔다는 걸 기업들이 되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효석 강보현 권민지 김이현 이성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