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주 초 제약회사들이 코로나19 백신을 ‘곧’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닥터 파우치는 백신 개발은 “최소 1년이나 18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닥터 파우치는 “항바이러스 약품들이 이 병의 상태를 완화할 수 있는지 연구 중에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봄이 되면 이 병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닥터 파우치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병은 새로운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는 미국에서 닥터 파우치의 말이 광범위하게 신뢰를 받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NYT는 그가 대통령의 발표에 대해 틀렸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적인 설명을 통해 대통령의 얘기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공중보건이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미국 대중들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과학자와 의사들”이라는 도나 E 샬랄라 의원의 말을 덧붙였다.
앤서니 파우치(Anthony Fauci), 79세, 의사, 미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 1984년부터 NIAID에서 소장을 맡아온 그는 6명의 대통령과 함께 일하며 미국의 감염병 대응을 주도해온 최고 전문가다. HIV, 사스, 메르스, 에볼라 등 각종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러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직면한 미국 시민들의 SNS에는 “Dr. Fauci Said”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닥터 파우치가 이렇게 말했다”는 코로나 공포 속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지침이 되고 있다. 닥터 파우치는 지난 일요일에도 TV에 출연해 노인들과 기저질환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위험하며, 크루즈선과 항공편,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얘기는 일제히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날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면서 대규모 대선 유세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정치가의 말과 전문가의 말은 다르다. 정치인들은 보건 위기 상황에서도 정치적 계산을 포기하지 않는다. 위기를 축소하거나 과장한다. 총선이나 대선을 앞두고 있다면 이런 왜곡은 더욱 심해진다. 전문가들은 과학적 사실을 중시한다. 감염병 사태 같은 상황에서 전문가들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물론 전문가들도 종종 정치에 복속되곤 한다. 침묵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공정하고 용감하며, 또 노련한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시민들은 지금 마스크를 써야 되는지 안 써도 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사태 초기 마스크 쓰기를 그토록 강조하던 정부는 최근 건강한 사람들에겐 마스크가 필요 없다는 식의 얘기를 하고 있다. 시민들은 그것이 과학의 얘기인지, 마스크 수급 실패에 대한 책임론에서 벗어나려는 정치의 얘기인지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스크 문제에 대해 과학적 진실을 용감하게 전하는 전문가의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중국 입국 금지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란도 마찬가지다. 이 논란을 주도한 이들은 정치와 언론이었다. 감염병과 방역을 다루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이 과정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언론 역시 정치인과 전문가, 사이비 전문가와 진짜 전문가 사이에서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 누가 진짜 전문가인가 구별하고,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사실은 정당의 하수인에 불과한 가짜 전문가들, 잘 모르면서 이번 기회에 자신을 팔아보려는 얼치기 전문가들을 걸러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정치에 밀려 침묵을 강요당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야 한다.
김남중 국제부장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