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만감이 교차하는 하루를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다. 매일 불어나는 확진·사망자 수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쓰면 불편하고, 안 쓰자니 찝찝한 마스크 때문에 짜증도 난다. 코로나19 창궐 지역 한복판에 사시는 부모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괴롭다. 전화상으로 “우리는 괜찮다”는 목소리를 들을 때 그나마 안도감이 든다. 개학 연기로 하루 종일 아이들과 집에서 시달리는 아내에게 미안하면서도, 퇴근 후에 떠들고 장난치는 애들을 보면 피곤함 뒤로 ‘오늘도 잘 넘겼구나’ 하는 고마운 마음도 든다. 그러다가 마스크 때문에 길게 줄 서 있게 만드는 정책에 화가 나면서도 싸게 파는 데라도 있으면 왕창 사놓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온갖 감정이 수시로 뒤섞이다 보니 연일 마음이 뒤숭숭하다.
다양한 감정은 극히 정상적이다. 중요한 건 각각의 감정에 따라 어떻게 반응하느냐일 것이다. 짜증이 난다고 물건을 부수거나, 불안한 마음을 술이나 약물로 다스리는 건 해법이 아니다. 상담심리학자들은 부정적 감정들을 잘 대처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꼽는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방식이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으면, 시간을 두고 한걸음 물러서서 ‘그가 왜 그랬을까’ 이성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불안감도 마찬가지다. 불안감을 갖게 만드는 대상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의 입장에서 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지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은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꽤 도움을 준다고 한다. 불안감의 일종인 걱정과 두려움, 무서움 같은 감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감정을 야기하는 대상의 입장에 한번 서 보라는 것이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는 지혜는 성경의 ‘황금률’과 일맥상통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12절)는 구절인데,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타인에게도 하지 말라’ 같은 ‘토라’(Torah·유대교 경전)의 핵심 경구도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복잡한 감정만큼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목도한다. 자신의 아들에게 마스크 폭리를 취하게 만드는 마스크 제조 업체 사장이 있는가 하면, 선거와 맞물린 비상 시국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술수도 엿보인다. 하나로 뭉쳐 대처해도 힘이 모자랄 판에 시비를 부추켜 편을 가르는 SNS의 댓글들도 마음에 상처를 준다. 오죽했으면 어느 댓글은 ‘차라리 IMF 때가 낫다. 그때는 모두가 힘들어도 하나는 됐었으니까’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을까. 또 다른 풍경도 있다. 대구·경북 지역의 병원으로 달려가 묵묵히 자원봉사 대열에 합류하는 의료진들이 있다. ‘우리 지역으로 오라’며 남는 병상을 제공하는 지방자치단체들, 경증 환자들을 위한 생활치료시설로 수련원과 연수 시설을 선뜻 내놓는 교회와 기업들 소식도 듣는다. 처지를 바꿔 헤아리는 마음이 와닿는다.
코로나19 여파는 예측하기 힘들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전망도 나온다. 새해 들어 반등을 시도해보려는 경제는 다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성장률 전망 그래프는 더 꺾이고 있다.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으로 긴급 처방을 내놨는데, 얼마나 효과를 낼지는 의견이 갈린다. 우리 모두가 ‘코로나 폭풍’을 단단히 각오해야 할 시기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함께 맞서서 이겨내야 한다. 역지사지의 마음이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황금률이 아닐까. 오늘 하루도 만감이 교차하겠지만, ‘함께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의 마침표를 찍고 싶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