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람과 살지 않는 고양이를 ‘동네고양이’라고 부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흥미롭고 멋진 일이다. 언어가 바뀌면 인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고양이라는 동물에 대한 내 호감도의 변화를 돌아보게 됐다. 내 마음의 변화 역시 명칭의 변화와 맥을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고양이는 낮보다 밤이 어울리는 동물, 악당의 수하, 불운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주변에 애묘인도 드물었고 나처럼 고양이를 꺼리는 사람들이 흔했다. 그러한 인식에는 ‘도둑고양이’라는 명칭이 한몫했다. 도둑이라니,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 섬뜩한 눈동자를 빛내다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몫을 훔쳐갈 것만 같았다. 깊은 밤 화단에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는 소름 끼쳤고, 우연히 마주치는 날엔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실 그 작은 짐승들은 무엇도 도둑질하지 않았다. 쓰레기봉투를 뜯어 음식 같지도 않은 무언가로 조그만 배를 채울 뿐이었다. 버리려고 내둔 것을 뒤졌는데 도둑이라니. 굳이 모멸적 이름을 붙여준다면 거지고양이 정도가 어울렸을 것이다. 사람과 살지 않는 개는 주로 들개라고 불리는데 왜 고양이만이 ‘도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달게 됐을까. 아마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리라. 우리의 소유물을 도둑질하는 존재들, 정돈된 공간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골칫덩이들. 그들은 절멸시켜야 할 해충처럼 여겨졌다. 쓰레기터엔 덫과 약이 놓였다. 도둑에겐 단죄가 당연했다.
시간이 가며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애묘인이 늘어났고 고양이 관련 콘텐츠들이 쏟아졌다. 그 무렵 ‘길고양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도둑’에 비해 훨씬 중립적인 명칭이었다. 사실 그랬다.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빌붙어 사는 존재로서, 압도적인 면적을 독식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도둑이라 부른단 말인가. 그들은 그저 길에서 태어났기에 길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척박한 생존환경 때문에 빈번하게 찾아오는 발정기, 좋지 못한 섭생으로 퉁퉁 부은 몸, 영양 부족으로 뭉쳐버린 꼬리. 여름은 지독했고 겨울은 잔혹했다. 고양이는 보통 15년가량을 사는데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3년에 불과하다고 들었다.
고양이를 새로이 보기 시작하며 나는 이 동물을 좋아하게 됐다. 고양이들이란 등 뒤에서 흉계를 꾸밀 것만 같았는데 실은 허술하고 맹한 녀석들이었다. 보드랍고 따듯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주어지면 온몸을 구륵구륵 울리며 기뻐하는 존재들이었다. 인식의 전환은 놀라웠다. 불길하게만 여겨졌던 눈동자는 이제 내 눈에 보석처럼 영롱해 보인다. 한겨울 새된 소리로 우는 소리를 들으면 예전엔 오싹했다면 지금은 안쓰럽다. 어둑한 새벽 내 앞을 가로질러가는 고양이를 본다면 이젠 아침부터 운수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 드디어 ‘동네고양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이다. 그 이름으로 인해 그들은 내 곁의 고양이, 함께 사는 존재, 동네마다 어슬렁거리는 고정 멤버가 됐다. 외면을 넘어 물리쳐야 하는 존재였던 도둑고양이가, 길고양이라는 좀 더 중립적인 명칭을 얻더니, 마침내 동네고양이로 우리 삶에 편입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보란 말인가. 인간이 성숙해지면 남을 배려하기 시작한다. 사회의 성숙도도 소외받는 존재에 대한 배려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99를 가졌는데 1을 취하려는 그들을 도둑 취급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쓰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새로운 언어가 태어나고 있다. 더 크고 아름답고 배려하는 언어가.
말은 생각을 반영하고, 말은 생각을 조형한다. 그렇기에 언어를 바꾸려는 시도가 참으로 근사하다. 그것이 곧 생각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고양이의 다른 말은 이웃고양이 같다. 그들은 도둑에서 이웃이 됐다. 말살해야 하는 존재에서 함께 사는 존재가 됐다. 내가 사는 세상은 더디지만 착실히 좋아지고 있다. 나는 이 변화가 뿌듯하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