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준경 전도사 흔적 따라 ‘12사도 순례길’… “영성의 요람 만들 것”

입력 2020-03-05 00:07
전남 신안군 증도면 기점도·소악도에 있는 12사도의 집.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베드로의 집, 필립의 집, 유다 타대오의 집, 가롯 유다의 집. 소악교회 제공

전남 신안군 증도면 기점도 ‘베드로의 집’. 파란색 돔이 있는 둥근 아치 형태의 하얀색 건물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을 방문한 순례객은 3평(9.9㎡) 남짓한 예배당에서 조용히 묵상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건물 앞에는 드넓은 개펄이 펼쳐져 있다. 하루 두 번 물이 빠지면 얕은 수심의 바다는 개펄이 된다. 드러난 개펄은 섬과 섬을 잇는다.

기점도와 바로 옆 소악도에는 이 같은 영성 순례 건물이 12개나 있다. 베드로뿐 아니라 안드레 야고보 요한 필립 등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딴 12사도의 집이다.


전남도는 2017년 기점도와 소악도를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하고 5년간 4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증도면 주민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점과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와 관련된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주제를 ‘순례자의 섬’으로 정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착안해 ‘12사도 순례길’을 지난해 말 조성했다. 삶에 지치거나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이 ‘온종일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 섬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순례하게 하자는 취지다.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을 잇는 12㎞ 길에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하는 작은 예배당들을 지었다. 기점도와 소악도 주민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12사도의 집은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종교가 없는 일반인에게는 스스로를 성찰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종교를 떠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한다.

기점도와 소악도를 비롯한 신안의 섬들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인연이 깊다. 70여년 전 보따리를 이고 노두길(바닷물이 빠지면 생기는 길)로 작은 섬을 건너다니던 문 전도사의 헌신적인 전도와 그의 비극적 순교가 이 땅에 한 알의 밀알로 심겨졌다. 그 기록이 증도의 문준경전도사기념관에 남아있다. 신안 암태도 출신인 문 전도사는 한 해 고무신이 아홉 켤레나 닳을 정도로 선교에 앞장서 신안에만 100여곳의 교회를 개척했다.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 후 세워진 소악교회. 소악교회 제공

증도면 소악도에 있는 소악교회(임병진 목사)는 ‘12사도 순례길’이 단순 관광에 이르지 않고 크리스천뿐 아니라 일반인도 의미 있는 영성 순례를 하도록 지원하는 사역을 한다.

최근 담임목사로 부임한 임병진 목사는 3일 국민일보 전화 인터뷰에서 “증도면에 있는 열한 개 교회 중 여덟 개는 증도에 있고 세 개는 병풍도에 있다”며 “증도에 있는 교회들은 문 전도사가 직접 개척했거나 기도처로 만들었던 곳이 나중에 교회로 세워졌다. 병풍도에 있는 교회들은 문 전도사가 6·25전쟁 때 순교한 후 세워졌다. 병풍도의 어머니 교회인 병풍교회를 통해 1986년 소악교회가 개척됐다. 문 전도사의 영성이 담긴 교회”라고 말했다.

임병진 소악교회 목사

임 목사는 “문 전도사는 증도대교 아래에 있는 광암 나루터나 사옥도 나루터에서 병풍도로 들어와 대기점도, 소기점도, 병풍도의 끝 섬인 소악도까지 노두길을 오가며 복음을 전했다”며 “12사도 순례길은 바로 문 전도사가 전도했던 사명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임 목사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던 2007년 책과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해 문 전도사를 알리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순교자인 손양원 주기철 목사 외에도 다음세대가 기억할만한 역사적 인물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문 전도사 일대기를 그린 책 ‘천국의 섬’ ‘문준경에게 인생의 길을 묻다’ 등을 펴낸 임 목사는 2007년부터 문 전도사의 삶을 조명하는 1박2일 코스의 ‘증도 순례’를 100회 이상 이끌었다.

주민 수가 100여명에 불과한 기점도와 소악도에는 식당이나 숙박 시설이 부족하다. 교회는 최근 게스트하우스인 ‘순례자의 집(자랑께)’과 카페(쉬랑께)를 오픈했다. 교회는 임 목사가 이끌어온 증도 순례와 12사도 순례를 연계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임 목사는 “교회는 이곳을 찾은 크리스천에게는 영적 의미와 목적을 찾도록 도우미 역할을 할 것”이라며 “일반 순례객도 주님을 섬기듯 환대해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증도의 문 전도사 순교지와 12사도 순례길, 임자도 기독교체험관(문 전도사가 처음 개척한 교회) 세 곳을 세계적 기독교 영성 순례지로 특화해 한국교회의 순교 영성 요람으로 만드는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